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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성 - 곽재우장군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던 화왕산성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32번지

창녕 읍내 동쪽에 솟아 있는 표고 739m의 바위산인 화왕산 위에 축조되어 있다. 이 성은 남북 두 봉우리를 포함하여 둘레가 2,600m의 석성으로 화왕산성이라고 쓰는데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되며 가야의 산성으로 생각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창녕의 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과 창녕 뿐만 아니라 영산·현풍을 포용하는 성이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의미가 큰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의 기록을 보면 둘레가 1,217보(1步는 6尺)이고 성내에는 샘 9곳, 못 3곳, 군창이 있으며 성안의 넓이는 39結 61卜 5束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요지에 있었던 산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200년간 계속된 평화 속에서는 거의 실용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어 옛 성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세종실록지리지] 및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참고로 하여 보면 세종시대에 이미 폐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순식간에 대로를 따라 북상하게 되자 화왕산성의 군사적 이용이 새로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紅衣將軍 郭再祐의 의병 근거지가 바로 화왕산성이었다. 곽재우 장군이 이 성을 거점으로 하여 왜군이 진주를 통해 雲峰으로 진출하려한 길을 차단하고, 부근의 정진(鼎津)나루를 굳게 지켜 왜군의 경상남도 침입을 막을 수 있었던 것도 이 화왕산성의 지세에 힘입은 바 켰다. 그 밖에도 화왕산성의 지리적 이점은 임진왜란 중 이 성에 근거하였던 밀양부사 李英이 守城將으로 있었을 당시 부산에 있었던 왜적의 진영에 돌진하여 사납게 부수거나 야격을 가하거나 혹은 미격하여 왜군을 목벤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왕산성의 군사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9년(1596)에 諸道都體察使 李元翼에게 명하여 성을 수축케 하였고 丁酉년(1571)에는 곽재우장군이 내성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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