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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유적지 - 자연에 순응적인 산수정원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2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음력 6월 22일 한경(漢京)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서울 명동성당 정면 건너편)에서 출생.
그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해남 윤씨의 시조 존부(存富)로부터 16세손(世孫).

전남의 해남사람으로 당대의 국부였고 후에 호조참판에 추증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은 그의 고조가 된다. 조부 윤의중(尹毅中)에게는 유심(唯深)과 유기(唯幾)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예빈시 벼슬을 지냈고 차남은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까지 역임하였다. 고산은 유심의 아들 중 둘째아들이다. 한편 유기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하여 백부 홍중(弘中)에게 입양, 유기 역시 아들이 없어 고산을 양자로 삼았다.(8세때)

고산의 일생을 흔히 유배와 출신 그리고 은둔의 세 가지리로 나누어 말함은 85세로 세상을 마치기까지 파란많은 일생이었음을 증명한다.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바르며 곧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여 바른말 하는 선비였다 하니 그의 일생이 결코 순탄할 수 없었던 요인이 되겠다.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나 광해에 아첨하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보다 못해 병진소(丙辰疏)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31세(광해 9년) 때 gkarud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고 다음해에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유배(귀양살이 6년간)되었다.

고산은 37세가 되던 해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나 곧 사직하고 향리 해남으로 돌아옴. 그후 독서에 정진.

해남반도 남단으로부터 남으로 12km즘 되는 거리에 보길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의 최고봉인 격자봉(435m)을 중심으로 하여 북동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계류주변을 윤선도가 부용동이라 불렀고 병자호란 이후 이 일대에 정사를 세우고 지당을 축조하는 등 도피적 별서생활을 한 유적이다.

고산은 이곳에서 약12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해남의 금쇄동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를 남겨 국문학사상 일대 금자탑을 세웠으며 보길도 부용동에서는 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남기는 등 자연경관을 노래한 많은 시문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고산연보에 의하면 이곳에 온 때는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 51살 때 일이다.

원시림을 개척 길을 만들고 격자봉 아래에 촉실을 하여 낙서제라 이름했다. 또 건너편 산허리에 있는 비벽층태 위에 소옥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했으며 동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계천이 흐르는데 이곳은 물이 깊고 광담이 있어 담가에 정자를 세우고 세안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주위에 동하각, 칠암헌, 호광루 등을 세웠고 기타 자연물에 대해서는 소은병, 혁희대, 랑음대, 독등대, 오운대, 연선대, 상춘대 라 하여 각기 그 형태에 어울리도록 명명하여 자연을 벗삼았다. 말년에 마지막 노경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 85세(1671)로 낙서제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 보길도 유적은 규모 면에서 경외 제일이며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 순응적인 산수정원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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