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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청해진 유적 - 장도 청해진 유적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삼국사기 흥덕왕조에 의하면 동왕 3년(828) 4월에 장보고가 중국에서 돌아와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으로써 지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고 했다. 설치의 이유는 중국의 도처에서 신라인이 붙잡혀가 노비가 됨은 물론 이들의 해적 행위가 막심하여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청해진은 현재 완도읍에서 북쪽으로 약 6km쯤 떨어진 장좌리 장도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야산을 형성한 조그마한 섬으로 육지에서는 170m 떨어져 있고 간조 때는 육지와 연결되며 만조 때는 수심이 1.5 ~ 2m 정도가 된다. 장도는 외성과 내성의 토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고 삼국시대부 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 와편, 자기편 등이 산재하고 있다. 또 남측해변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는 일정한 간격을 둔 높이 30 ~ 40cm되는 목책 밑부분이 남아 있다. 이들 목책에 대해 방 사성회소연대를 특정해본 결과 AD 840년으로 나와 이 장도가 청 해진성으로서 장보고의 거성이며 이곳에 군영이 있었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장보고는 현 완도읍 자좌리에서 덕수 장씨 백익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장씨연원보감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 백익은 중국 절강성 소주부 용흥촌에서 출생하여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장보고의 자는 궁복 또는 궁파라고 하였으며 소년 시절은 완도에서 보내다 동향의 벗 정년과 함께 청년시절 중국에 건너가 서주(현 강소성 금산형)의 무년군에서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는 서주에서 군중 소장이 되었으나 흥덕왕 3년(828)에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 설치 후 일본 구주를 왕래하면서 교역을 벌였으며, 중국 적산법화원을 통해 국제 무역도 활발히 행했다. 이때 신라에 들어온 수입품으로는 멀리 타슈켄트 지방의 보석, 캄보디아 ·보르네오·자바 등지의 모직물, 스마트라·참파의 향료 등으로 당시 귀족들의 사치가 심하여 흥덕왕이 교서를 내려 금지를 시킬 정도였다. 뒷날 장보고는 신라왕정의 혼란기 때 군사적으로 금우징을 도와 신무왕에 즉위(AD 839)케 하여 신무왕은 그 공로로 삼의군사로 삼고 식봉 2천호를 내렸다. 그러나 뒷날 왕비 계승 문제로 왕실과 의 반목이 야기되어 자기 부하인 염장에게 피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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