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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석비(1기) - 월남사지석비(1기)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장방형 지대석 위에 귀부를 마련하였는데 대석과 귀부는 단일석으로 함주귀부는 강렬한 사실적 기법을 보여준 석비이다. 전족조단(前足爪端)이 좀 둔화되어 생동감이 결여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나 네발 전체의 현실성이나 직경(長頸), 머리부분과 그 세부의 운동표현 등은 이 비의 전체적 균형과 함께 다른 귀부가 따를 수 없는 우수성을 보이고 있다. 비좌는 간결하게 운문을 선각했으며 비의 상반부는 절단 멸실 되었고 잔존한 하반부도 각자(刻字)의 풍화마멸이 심하여 그 내용을 판독할 수가 없다. 월남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편>에 의하면 월남사는 월출산남쪽에 있으며 고려 승려 진각이 창건했고, 이규보 비가 있다(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 라고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월남사는 송과사 16국사 중 제2조인 진각국사의 창건이 되고 비문도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규보가 썼다는 결론으로 된다. 1968년 조사때 「이 비의 음기에 최항 등 인명이 있어 고려 성종대 10세기말로 비의 조성 년대를 추정」하였으나 여기 나타나는 최항(고려 현종대)은 동명이인인 고려 고종대의 인물인 「최항」(?~1257)의 착오로 추정된다. 더욱 추자 「최항」은 진각국사, 이규보와 함께 13세기 중엽의 인물이고 한때 송광사에서 중이 되어 화순 쌍봉사 등지를 편력 하다 환속한 기록이 있어 진각국사와의 관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석비는 위의 사실 등을 종합해 볼 때 월남사의 창건주인 진각국사(1178~1234)를 추모키 위하여 이규보(1168~1241) 가 찬한 진각국사비로 추정되며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송광사 사적기≫<진각국사편>이다. 진각국사의 속성은 최씨요 이름은 혜심으로 화순현 사람이다. 24 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그 뒤 모친의 별세로 인하여 출가, 보조국사의 문하에서 선가의 위치를 굳혔다. 국사는 고종 21년 (1234) 수세57, 법랍 32세로 적멸했다. 따라서 이 비의 조성 또한 13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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