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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 - 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최덕지는 고려 우왕 10년(1384)에 출생 조선 세조 원년(1456)에 죽었으며, 자는 우유, 호는 연촌 또는 존양당이다. 태종 5년(1405)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 정자에 이어 뒤에 사사의 벼슬을 지냈다. 또한 노년에 이르러 남원부사에 올랐 다가 사퇴, 영암 영보촌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연촌유사」에 의하면 최덕지 영정은 원래 3본이 있었는데 그 중 1본은 생전의 진상으로 존양루 구지 영당에 봉안했으며 나머지 2 본 가운데 1본은 녹동서원에, 또 1본은 주암사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종손의 가전에 의하면 이 본은 어전에서 화사가 그렸다 하나 화상 의 복장이나 자세로 보아 어전에서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작품 자체는 화가가 오랫동안 대상인물을 숙시한 연후 그린 것으로 보인 다. 앉은 자세의 형용이 더없이 편안하며, 눈초리, 손의 표현, 의첩 의 처리 등 세밀하게 처리되었다. 또 모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발립을 쓰고 있다.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는 데 눈썹은 일단 담묵으로 칠하고 그 위에 털을 한 올 한 올 방향이 밑으로 숙여지게 하여 숫 많은 눈썹의 성격이 살아 있으며 눈매는 작지만 생기차고 명상적인 눈빛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 유지초본이 같이 유존되고 있으며 다른 유지본이 안면 이하 기껏해야 윰부까지의 크기에 비해 이는 정본과 같은 크기여서 더욱 더 작가의 초안과정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영정은 후에 손질한 기록이 보이는데 「연촌유사」에 의하면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시 진상을 창황히 나주 세화리 묘산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나고 수년이 지나 파보니 다행히 완존하여 썩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화상개장찬문」내용을 보 면 당시 광해군 2년(1610) 4월에 용산에서 개장하여 덕진교로 이 봉한 것은 인조 13년(1635) 2월이라 했다. 따라서 개장시 개채를 약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초상화는 안용으로 미루어 보아 최덕지의 만년기 상으로 차림새는 고려 말 조선 초 선비의 휴거지용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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