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돌하르방 - 육지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했던 석상

by 넥스루비 2007. 8. 7.

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 등으로 불리우는 이 석상은 제주목·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것이나, 현재는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대학·제주시청·제주국제공항· 삼성혈·관덕정 등에 산재하여 있으며 제주시내에 21기, 성읍에 12기, 대정의 인성·안성·보성에 12기 도합 45기가 있다. 석상의 형태는 대체로 벙거지형 모자,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큼지막한 주먹코, 꼭다문 입술 두손은 배위 아래로 위엄있게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돌하르방의 크기는 평균 신장이 제주 187Cm, 성읍 141Cm, 대정 134Cm 이며 제작 연대는 영조 30년(1754)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석상은 성문 앞에 세워져서 수호신적·주술종교적·경계금표적 기능을 했건 것으로 육지의 장승의 기능과 유사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돌하르방은 오늘날 국내외에서 제주도를 표상하는 상징물처럼 잘 알려졌을뿐더러, 세계인들의 총애를 받는 진중한 민속자료다.

'돌하르방'이란 말은 근래에 생긴 명칭이고, 원래의 이름은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등이다. '옹중석(翁仲石)'이라고도 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 통용된 바는 확인되지 않는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돌할아버지'의 제주어(濟州語)로서 1971년 제주도 문화재위원회에서 신중히 논의하다가 문화재 명칭으로 채택한 이래,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돌하르방은 어디에 세워졌을까? 제주도의 행정구역이 삼분되었던 약 500년 동안(1416∼1914) 제주목(濟州牧)·대정현(大靜縣)·정의현(旌義縣) 도읍지의 성문 앞에 쌍쌍이 세워졌었다. 제주목의 것은 모두 원위치에서 이설(移設)되었고, 대정현이나 정의현의 것들은 대부분 원위치에 놓여있다. 모두 47기인데 제주목의 것이 23기이며, 대정현·정의현 현청소재지에 각각 12기씩 남아있다. 제주목의 돌하르방 23기 가운데 2기는 「경복궁 한국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지금 제주도내에 남아있는 것은 모두 45기다. 47기의 돌하르방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부리부리한 큰 눈매에 자루병 같은 코를 하고, 입술을 단정히 다문 얼굴에 감투를 썼고, 두 손은 배에 나란히 모여 위엄있게 서 있는 모습이다.제주시에 있는 것과 남제주군군 성읍리에 있는 것은 밑에 기석(基石)이 받쳐져 있는데, 특히 제주시의 것은 기석의 전면에 O와 L형(型)으로 음각되었는데 그 기능을 구명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돌하르방의 크기는 제주시의 것이 가장 커서 평균 신장 181.6㎝, 성읍리의 것이 141.4㎝, 대정에 있는 것이 136.2㎝인데, 제주시에 소재한 것이 다른 두곳에 있는 것보다 더욱 위용(威容)있고 예술성이 짙게 조각(彫刻)되었다. 돌하르방의 주요기능은 육지부의 장승의 기능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하르방이 제작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 유래에 대하여 담수계(淡水契)에서 펴낸 『탐라지(耽羅誌)』에는 서기 1754년(영조 30년)에 김몽규(金夢奎) 목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의 행정구역이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나누어진 때가 1416년(태종 16년)이요, 얼마 없어서 각각 도읍지에 축성(築城)되었으니 18세기 중엽에야 돌하르방이 세워졌다는 말이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그 사이에는 성문 앞에 돌하르방과 같은 것이 전혀 없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요마적에 이르러 돌하르방의 맥락을 둘러싸고 갑론을박 갖가지 주장이 난무한다. 혹은 몽골의 석상(石像)과, 혹은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관련설을 주장하곤 한다. 외국의 석상들과 대비 고찰(對比考察)하는 작업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이에 앞서서 한본토의 돌장승(돌벅수)과의 비교연구가 선결과제다. 형상(形像)이나 명칭(名稱) 및 기능(機能) 등에서 상통되는 바가 짙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