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177-1
이 가옥은 현 소유자의 5대조가 같은 마을에 있던 큰 집에서 살림을 나게 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하나, 상량에 사랑채는 조선 영조 49년(1773년)에, 안채는 고종 23년(1886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을 살펴보면 전북지방 상류가옥에서는 희귀한 고패형식의 안채와 안채 전면에 세워진 일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서쪽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권씨 자신의 인근에서는 널리 알려진 독농가이기도한 까닭에 이 집은 부농가로서 많이 변모되어 현재도 가옥의 모든 공간이 활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상류가옥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채 껍데기만 남아 있는 사실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건물중 안채, 사랑채, 서쪽채 등은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많이 변개되었다. 문간채는 블록으로 쌓아 창고로 개조하였으며, 바깥채도 벽돌로 지어 외양간, 창고, 목욕탕 등으로 사용된다. 아래채 역시 창고를 비롯하여 담장, 돼지우리, 외양간 등의 축사를 두었다. 이외에도 사랑채 정지의 한쪽을 막아 여물청으로 꾸미고, 안채 남측벽상부에 수장공간을 설치한 점 등을 보면, 이집의 주인이 매우 용의주도하게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채의 2칸 광과 나무채 등을 합하면 이집의 수장공간은 주거공간에 비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랑채 가운데 방의 북쪽을 막아 골방을 두고 권씨가 이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점, 그리고 안채 대청의 한 칸을 비우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 등도 매우 주목을 끈다. 현재 안채의 작은 방에서는 큰 아들내외가, 서쪽채의 방에서는 작은 아들 내외가 기거하고 있다. 상류가옥으로서 커다란 변화없이 권씨 자신의 농사를 지으며 그의 두 아들이 한 집에서 기거하고 있음을 보면 가옥의 규모에 걸맞는 가족체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 가옥은 상류가옥이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매우 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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