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릉 정려비 - 서릉 정려비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장성군 북이면 128

서릉의 정려비는 1578년(선조 11) 장성지방의 사림들에게 흠모의 대상되었던 서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과 향유들이 건립하였다. 서릉은 고려 고종 때(1213~1259 재위)의 사람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장성현〉조에 기록이 나타난다. 현재의 북일면 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대방, 호는 어성, 시호는 절효공으로 이천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효심과 학문이 지극하고 뛰어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의 목에 큰 종기가 생겨서 의원에게 물으니 살 아 있는 청개구리만이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때는 한 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애통하게 흐느끼다가 하는 수가 없어 의원과 상의하여 우선 약을 조제하여 집 앞 나무 아래에다 약탕관을 걸고 약을 끓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청개구리가 떨어져 약탕관에 들어갔다. 이를 본 의원은 하늘이 효성에 감동하여 내려준 약제이며, 이로써 어머니의 병환은 완쾌될 것이라 하였다. 과연 약을 드신 서릉의 모친은 병이 낳았고 그로부터 그의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은 온 나라안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알고 고종 때에 정려를 내려 포상하였으나 정확한 연재 는 알 수가 없다. 비가 세워진 뒤 1669년(현종 10)에는 변효 등 12인인 유사들 이 주동이 되어 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여 1694년(숙종 20) 에 완결시켰으며, 이때 동춘 송릉길(1606~1672)이 정려각의 액편을 썼다. 1824년(순조 24)에 중수, 현재의 건물은 1913년 에 중건하였다. 이 비는 절효 서릉의 행적, 연대, 사기기록을 주목하여 볼 때 고려시대 호안 지방 효행의 상징이라 하겠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