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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성지 - 왜구침공에 대비한 목성

by 넥스루비 2007. 8. 7.

제주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명월성지(明月城址)는 조선 중종 5년(1510) 장림(張林) 목사는 비양도가 가까이 있으므로 왜구 침공이 쉬운 곳이라 하여 목성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후 선조 25년(1592) 이경록(李慶祿) 목사가 석성으로 개축한 것이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레는 3,020척, 높이가 8척으로 타첩 123, 격대(擊臺) 7개가 있었으며, 동·서·남문에는 1칸씩 초루( 樓)가 있었다. 성안에는 수질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어 동문 밖 큰천과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 내렸다.(지금은 북제주군에서 식수원으로 활용하고 있음.) 샘이 마치 냇물처럼 물이 솟아남으로 사철 물걱정이 없었다 한다. 1764년(영조 40) 이수봉(李壽鳳) 어사가 아뢰어 조방장(助防將)을 만호(萬戶)로 승격시키고 제주인 중에서 삼망(三望)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제주목의 서쪽에 있는 큰 진이므로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사령방(使令房. 2칸), 공수(供需. 2칸), 군기고(軍器庫. 4칸), 도청(都廳. 4칸), 진고(賑庫. 4칸), 창대청(倉大廳. 3칸), 진솔청(眞率廳. 3칸), 창고(倉庫. 2칸) 4동이 있었다병력은 만호 1인, 취총 4인,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사 22명, 서기 30명 외에 소관 봉수대 2개소, 연대 7개소이므로 별장 54인, 봉군 132명이 있었다. 해안에는 수전소도 있어서 판옥선과 노젓는 군사 103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성벽은 동문과 남문 사이 120m의 외벽 성석(城石)이 남아 있고 그 사이 격대 3개도 윗부분은 허물어져 자취만이 있다. 옹성(甕城)은 동문에 외벽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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