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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궁 고조기 묘 - 고려 인종·의종때의 문인 중서시랑 평장사 고조기의 묘소

by 넥스루비 2007. 8. 7.

제주 제주시 아라동 2464

이곳은 고려 인종·의종때의 문인 중서시랑 평장사 고조기의 묘소이다. 고조기(?∼1157)의 본관은 제주, 초명은 당유(唐愈), 호는 계림(鷄林)이며 시호는 문경으로 고려 선종5년(1088)에 출생하여 의종11년(1157)에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우복사유(右僕射維)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개하고 경사에 널리 통하였음, 시에도 능하였다. 예종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남방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청백하게 공무를 보았다. 인조 7년(1129)에 시어사가 되었는데, 이때 이자겸(李資謙)이 홍경원(弘慶院)을 수리하면서 승정 資富(자부) 및 知水州事 奉佑(지수지사 봉우)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자, 주·현의 장정을 징발하여 그 피해가 극히 심하였다. 이자겸이 실각한 뒤 자부는 연좌되어 섬으로 귀양을 갔으나, 봉우는 환관과 결탁하여 계속 벼슬자리를 누리고 있으므로, 고조기는 그를 내칠 것을 상소하여 몇 차례 논박 끝에 임금의 뜻을 거슬려 정부원외랑(丁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대관(臺官)이 되었는데, 이자겸 일당이 제거되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를 배척하여 파직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대신들에 눌려 예부랑중(禮部郞中)에 임명됨으로써 대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147년(의종 1) 守司空上柱國(수사공상주국), 1148년 정당문학판호부사가 되어 지공거로서 유정견 등 25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으며, 이어 權判兵部事(권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삼지정사판병부사)가 되었다. 의종3년(1149)에는 정당문학 참지사의 직을 거쳐 중서시랑평장사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1151년에서 중관병바편사 겸 사북면병마판사를 역임하였다. 공은 조정에 출사한 이래 노령으로 퇴관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백으로 일관하였는데, 왕은 공의 높은 경륜과 절의를 기려 수사공상주국이라는 칭호를 붙여 그 작위를 높여 주었다. 이 묘소는 매년 4월 9일에 제주 고씨 종문회의 주관으로 제향이 올려지고 있다.묘역에는 '高麗中書侍郞平章事 高兆基墓(고려중정시랑평정사 고조기묘)'를 중심으로 좌측에 '留鄕高公之墓(유향고공지묘)'가 있고, 우측에는 비명을 알 수 없는 묘가 배치되어 있다. 주위에 보호책을 세웠으며, 그 내부에 정면 4.34m, 측면 5.13m의 장방형 봉분이 자리잡고 있다. 봉분 네 귀퉁이에는 현무암제 割石(할석)으로 2단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봉토 자체의 유실을 방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묘 자체의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다. 봉분 정면에는 중앙에 이중 제단을 두고, 좌측에 높이 3.4m의 '高兆基詩文碑)', 우측에 '中書時郞高兆基墓碑'라는 애초의 비석도 그대로 세워져 있으며, 비석 정면으로 장군석·동자석·귀질·상석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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