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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 AD 588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 전하고 ...

by 넥스루비 2007. 8. 7.
AD 588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 전하고 있다. 창건 당초는 자추사(刺楸寺)로 불렀는데, 어느 시기(통일신라)인지 정확치는 않으나 백률사(柏栗寺)로 불리게 되어졌다.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의 머리가 이 산에 떨어졌다고 기록한 "이차돈 육면석당(六面石幢)"이 이 백율사에 있었다는 것과, 자추사라고 불리워지게 되는 어원에서도 백율사가 곧 자추사인 것을 알게 된다. (刺楸寺의 "刺楸"는 "柏栗"과 상통되는데, 刺는 잣(柏)의 한자음이 되며, "楸"는 밤(栗)의 일종으로서 "栗"가 통한다)

창건 당시의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조선선조때(1600년대) 중창되었다고 전하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으로된 대웅전이 있고, 근세에 새로 지은 요사 2동과,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삼성각과 최근에 세운 종각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은, 석등 옥개석 1점·복판연화문과 귀꽃이 있는 불상대좌 중대석 1점·팔엽복판연하문이 새겨진 석등하대석 1점·석정개석(石井蓋石)1점·팔엽단판系 연판(蓮瓣)의 석등 중대석 1점·원형초석 2점으로 종각 남쪽앞 귀퉁이에 모아 놓았다.

대웅전 앞의 마주보는 암벽에 높이 3.15m, 상층 기단폭 1.4m의 마애 3층탑 1기가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암벽면을 가공하지 않은 자연면에다 그대로 조각한 것으로, 하층기단은 생략한 채 상층기단위에 비례를 감안한 적당한 크기의 탑신과 층급받침인 3단의 옥개로 3층을 만들고 보주와 용차등을 상륜부도 새겨놓은 이탑은 바깥쪽 윤곽만 조각하고 내부는 조각하지 않았다. 탑의 비례, 옥개석 층급 받침이 3단인 점, 하층기단이 생략된 점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 下代의 일반형 석탑을 模刻한 것으로 생각되고 제작년대도 통일신라 하대 또는 고려초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983년 7월 대웅전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금동여래입상(高5.0㎝) 1체, 이형금동구(異形金銅具, 長 5.5㎝) 1점, 연하문 원와당(직경 12.0∼15.6㎝) 6점, 당초문평와당 1점, 고려시대의 귀목문 원와당(직경 14.5㎝) 1점, 연화당초문 평와당 3점이 출토되었다. 경주 박물관에 진열중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이차돈6면석당도 이 사찰에 있던 것을 1914년에 옮긴 것이다.

또한 기록상으로만 전해오는 중국 공장(工匠)이 만들었다는 영험 많은 대비상(大悲像, 관세음보살상)도 백의관음이라 하여 조선시대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하나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전단목( 檀木)으로 만든 불상도 또한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종각과 요사가 자리한 곳에 서루(西樓)라고 불리운 누각중의 누각이 1917년까지도 있었다고 하나 자취를 알 수 없다. 나라에서 향을 내려주어 왕실의 복을 비는 사찰로서 사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금강산에 있는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창건이래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중교통]
경주시내 -> 백률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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