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화산성 - 수많은 외침(外侵)의 역사 현장이다.

by 넥스루비 2007. 8. 7.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

권신(權臣) 최이(崔怡)는 강화천도(江華遷道)에 앞서서 1232년(年) 영군(領軍)을 동원(動員) 하여 강화(江華)에 궁궐(宮闕)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築造)하였다. 그리하여 고려(高麗)는 몽고(蒙古)의 제2차 침입(侵入)이 있는 1232년 6월 16일 대몽항전(對蒙抗戰)의 기치를 들고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하였다. 그러나 왕궁(王宮)과 도성(都城) 및 관아의 시설이 완비(完備)된 것은 아니었다. 제도(諸道)의 장정(壯丁)을 징발하여 강화성(江華城)과 궁궐 및 백사공해(百司公해)를 본격적으로 영조(營造)하기 시작한 것은 1234년 1월부터이다. 이때 송도(松都)의 궁궐과 비슷하게 하여 산(山)의 이름까지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성(城)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周圍) 3874척(尺)으로 지금의 강화성이며 중성은 1250년에 축성(築城)하였는데 주위(周圍)가 2960여간(餘間)으로 지금 선원면(仙源面)의 토성지(土城址)가 그곳인듯 하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築造)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화동쪽 해협(海峽)을 따라 길이가 37070척(尺)이였다 한다. 이들 성(城)은 모두 토성(土城)으로 축조되었다. 1270년(고려원종(高麗元宗) 11년) 5월 23일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하면서 몽고(蒙古)의 요청(要請)으로 강화(江華)의 성(城)을 헐었던 것이다.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다시 축성(築城)하면서 고려(高麗)의 내성(內城)이던 강화성(江華城)울 축소시켰다. 1637년 병자호란(病子胡亂)때 청군(靑軍)에 의하여 다시 파괴당하고 1677년 숙종조(肅宗朝)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공사(改築工事)를 하면서 성(城)의 규모(規模)를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내성규모(內城規模)로 넓혀서 전면석성(全面石城)으로 축성(築城)하였다. 그후 1709년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다시 개축(改築)하였고 조선말기(朝鮮末期)에 보수(補修)가 계속되었다. 성문(城門)은 동서남북(東西南北)에 4개소가 있고 암문(暗門)이 4개소 수문(水門)이 2개소가 있었다. 성문(城門)의 문루(門樓)는 남문에 안파루(晏波樓), 서에 첨화루(瞻華樓), 북에 진송루(鎭松樓), 동에 망한루(望漢樓)가 있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건립(建立)하였고 안파루는 퇴락되어 쓸어지자 1973년에 다시 복원(復元)한 것이다. 북문의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門樓)가 없었던 것을 1783년 성(城)을 개축(改築)하면서 건립(建立)되었다. 수문(水門)은 서문과 동문옆에 있었는데 서문옆의 것은 1900년경(年頃)에 갑곶진(甲串鎭) 옆으로 옮겨져 있다.동문쪽은 강화 시가지(市街地가 되어 성과 문루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現在) 성은 강화읍(江華邑)의 남북 산자락으로 완전히 남아있고 동쪽이 없어졌다. 체성(體城)은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쌓고 그위에 여장을 설치(設置)하였던 것인데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조선말(朝鮮末)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와 일본침략(日本侵略)에 의한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한 수많은 외침(外侵)의 역사 현장이다.


[승용차]
☆ 북문
김포공항→48국도→강화읍→고려당삼거리에서 우회전→고려궁지 왼편길 강화산성북문

☆ 서문
김포공항→48국도→강화읍 거의 지나 왼편에 위치

☆ 남문
김포공항→48국도→강화읍내 군청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약 20m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