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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 - 잇따른 외침(外侵)에 대비하기 위한 요새(要塞)로 축성된 것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칠곡군 가사면 가산리 산 98-1

이 산성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과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 外侵 >에 대비하기 위한 요새< 要塞 >로 축성된 것이다. 성내에서는 별장< 別將 >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고, 인근 지역 6개읍(경산< 慶山 >, 하양< 河陽 >, 신령< 新寧 >, 의흥< 義興 >, 의성< 義城 >, 군위< 軍威 >)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였고, 칠곡도호부< 漆谷都護府 >가 바로 이 산성내에 있었다. 내성: 인조< 仁祖 > 18년(1640) 관찰사< 觀察使 > 이명웅< 李命雄 >이 조정에 건의하여 축성하였으며, 당시 성의 규모와 시설은 다음과 같다. 성벽< 城壁 > 4,710보(약4km), 성문< 城門 > 3(동·서·북< 3(東·西·北 >), 암문< 暗門 > 8, 못 9, 우물 21, 장대< 將臺 > 2, 포루< 砲壘 > 4, 보루< 堡樓 > 5, 절< 寺 > 4(가흥< 架興 >, 정천< 淨泉 >, 통천< 通泉 >, 보국< 寶國 >), 기타 군영< 軍營 > 및 군창< 軍倉 >, 칠곡도호부가 내성 안에 있었다. 중성: 영조< 英祖 >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 鄭益河 >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내성의 안쪽에 있다. 성벽 602보(약 460m), 성문루< 城門樓 > 1(중성문< 中城門 >), 위려각< 衛藜閣 >(별장거소< 別將居所 >)외성: 숙종< 肅宗 > 26년(1700) 관찰사 이세재< 李世載 >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성벽 3,754보(약 3km), 성문 1(남문), 암문 3, 남창 1, 장적고< 帳籍庫 > 1, 절 1(천주사< 天柱寺 >)가산산성은 천험< 天險 >의 요새를 이용하여 3중< 三重 >의 성벽을 갖춘 것으로 성내에 많은 물이 있어서 산성입보< 山城入堡 >의 시설로서는 매우 바람직한 곳이었다.

[승용차]
● 법성 삼거리에서 한티재 방향으로 약 8백미터만 진행하면 기성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가산산성 이정표를 따라 진행

[대중교통]
● 고속버스
서울-대구

● 시외버스
북부터미널에서 천평행 시외버스로 동명면 학명동 하차

● 시내버스
대구(북부정류장,팔달교)에서 동명행(407,427번)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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