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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 -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포로(300명)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한 거제포로수용소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769-1번지

1950년 6월25일 동란발발 ,1950. 9. 15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많은 포로가 잡혀 부산, 경북등에 분리 수용하였으나 수용에 어려움이 있어, 1950. 11. 27 거제도 고현, 상동,용산,수월, 해명,저산,양정지구를 중심으로 360만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으며,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포로(300명)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다. 그당시 거제에는 주민 10만 피난민 약 15만명,포로 17만등 약 42만명이 거주하였다.

수용소안에서 300명의 반공포로를 집단 학살한 사건도 벌어지기도 했고, 인민군 포로가운데 공산당을 싫어하는 반공포로와 친공 포로간의 반목이 극심하여 서로간 치열한 살육전이 전개되기도 하였다.1952. 5. 7 아침에는 수용소장인 돗드 준장이 76포로수용소 시찰중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후임소장에 칠스콜슨 준장이 부임, 돗드 준장의 석방을 촉구하면서 5월 9일 고현지구 1,116세대를 24시간 이내에 다른 곳으로 강제 소개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돗주민들은 정든 땅과 집을 버리고 피난아닌 소개민으로 3년동안 고생하였다. 돗드 준장은 납치된 지 4일만에 석방됨으로써 전세계가 주목하였던 이 폭동은 일단락 되었으며 1953. 6. 18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27,389명을 석방시켰고, 이어 1953. 7. 27 휴전협정 조인으로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지금은 잔존건물 일부만 곳곳에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1983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후, 전쟁역사의 산 교육장 및 세계적인 관광명소를 조성하기 위하여 1999년 10월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개관하여 그 당시의 사진과 장비 및 의복 등을 수집 전시하고 있으며, 6.25동란과 포로수용소에 대한 영화도 부분적으로 제작 상영하고 있다.

유적지 야외 한켠에는 전쟁당시의 수용소 소장이었던 돗드준장의 거처와 집무실 건물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유적관의 구성이 전쟁유적치고는 차분한 편이라는 점이다.
친공포로들의 폭동과 친/반공포로 등의 대립장면을 각종 전시품과 자료들을 통해 주입식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가 하면 전시실 한켠에는 수용소 주변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사려까지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당시 북한군 포로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북한, 중국, 소련의 국기와 그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외국잡지 따위의 흥미로운 물건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유적관은 실내전시실과 야외시설물을 다 돌아보는 데 40분 ~ 1시간이면 충분하다.
거제시는 오는 2003년까지 약 60억원의 예상을 들여 지금의 포로수용소 유적관 곁에 그 당시의 포로수용소를 재현한 축소모형관을 새로 지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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