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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영서실 - 학문과 덕행을 겸비 한 선비 설진영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25

설진영(薛鎭永)의 본관(本貫)은 순창(淳昌)이고, 자는 도홍(道弘)이라 하였으며 그의 호는 남파(南派)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본래 진창(鎭昌)이었는데 후에 개명하여 진영(鎭永)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869년(고종 6년) 12월 8일. 지금의 금과면(金果面) 동전리(銅田里)에서 아버지인 증 좌승지(贈 左承旨) 상기(相基)와 어머니 탐진최씨(耽津崔氏) 사이의 3남 1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고 여러면에서 재주가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재동으로 인근에 이름을 떨친 그는 학문을 더욱 성취시키기 위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 학 자, 의병장)의 문하에 들어가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집전(子集傳)을 두루 탐구 하였다. 그리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두터워 말 그대로 학문과 덕행을 겸비 한 선비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그가 성장하는 시기는 시대적으로 볼 때 나라의 운명에 검은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는 때였다. 즉, 오랫동안 대륙진출을 꿈꾸어 오던 일본(日本)이 마침내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을 일으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그때까지 우리 나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청(淸)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배후 실력자인 민비(閔妃)는 이러한 일본세력을 견제하고자 이제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은밀히 러시아쪽으로 전환해 나갔다. 이러한 민비의 정책에 힘을 얻은 러시아가 일본의 노골적인 야망에 간섭하고 제동을 걸게 되자, 왜적은 마침내 1895년 (고종 32년) 4월 8일 민비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민비는 친일파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귀)가 보낸 30여명의 자객에 의해 경복궁에서 살해 되었고, 시체마저 홋이불에 싸서 석유를 뿌리고 불살리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터지자 전국 곳곳의 지사들은 의병을 일으켜 강도 왜적을 내치자고 일어섰다.
1896년 충주, 제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 1842∼ 1915, 학자, 의병장)의 격문이 이곳 호남지방에 이르렀다. 이때 설진영의 스승인 장성(長城), 나주(羅州)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05년에는 국치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1906년에 들어서는 기우만 의병장이 일본군에 체포되는 불운이 겹쳤다.
또 1910년에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선포되니 거세게 닥치는 대세에 그도 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뒷날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싸워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그는 망국통한의 아픔을 눈물로 달래며 잃은 나라를 다시 찾으려면 무엇보다 인재양성만이 그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미산(娥眉山) 남쪽의 동전리(銅田里)에 서실(書室)을 지어 놓고 혼자 있을 땐 고전을 읽고, 학생들이 모이면 글을 가르치는 한편 독립의식을 심어주는데 온 마음을 쏟으며 보냈다.
앞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그의 이름은 원래 진창(鎭昌)을 기재하자, 왜적의 법에 따라 만든 호적부에 오른 이름을 어찌 그대로 쓰겠냐며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즉석에서 진영(鎭永)이라 개명하여 사용하였다. 왜적의 뜻을 철저하게 거부한 그의 대쪽같은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그러다가 1940년 2월이 되자 국토를 다 집어삼킨 일제는, 이제 우리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려고 우리의 성씨(姓氏)를 일본식으로 고치는 이른바 창씨제도(創氏制度)를 실시하고 이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설진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나라를 잃고 이를 구하고자 일어섰으나 뜻을 이루지도 못했고, 또 그때 많은 지사들과 함께 죽지도 못했음이 늘 부끄러웠었는데 이제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성씨(姓氏)까지도 버리라 하니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더 살아야만 하는가.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생각하던 설진영은 그 길로 마을 건너편 평산에 자리한 설씨제실(薛氏祭室)앞의 논가운데 있는 우물로 찾아가 몸을 던졌다.그의 나이 71세, 1940년 5월 19일 새벽의 일이었다.
그가 투신한 우물가에는 평소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꽂혀 있고, 거기에는 그의 의관과 한 통의 유서가 얹혀 있었다. 유서에는 한 수 의 시(詩)가 적혀 있었다.
맹세코 성을 갈지 않으리라. 만약 성을 갈고 사당에 참배한다면 조상의 영혼이 얼마나 놀라 겠는가?
차라리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리라. 이어온 전통 나로 끊어 죄인되어 머리를 두르고 어디로 가랴.
저물에 몸을 던지네.
평생을 간직한 그의 고매한 정신의 향기가 깃들고 그가 머물던 그의 서실은 1910년에 건축 한 목재 기와집(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전라북도에서는 기념물 9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금과면 동전리 25번지에 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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