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암리3.1운동 순국유적지 - 독립만세운동시 경기도에서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3·1운동< 運動 > 때 일제< 日帝 >가 우리의 독립운동< 獨立運動 >을 가장 잔인< 殘忍 >한 방법< 方法 >으로 탄압한 대표적< 代表的 >인 학살사건현장< 虐殺事件現場 >이다. 이곳 일대는 일찍부터 기독교 교회당이 설립되고, 신자가 많이 사는 농촌이었다. 이곳에서의 3·1운동은 3월 10일경에 안종린< 安鍾璘 >·안정옥< 安政玉 >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던 것을 시작으로 하였다. 4월 5일에는 발안< 發安 >의 장날이어서, 이날 향남면과 팔탄면< 八灘面 >의 주민 천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지를 행진하였는데, 일제의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하므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투석전을 벌여 경찰부장이 돌에 맞아서 죽었다. 일제< 日帝 >는 수원에 주둔한 경찰과 헌병대를 동원하여 보복에 나섰는데, 4월 15일 오후에는 각처에서 보복행위를 하던 발길을 제암리로 돌리었다. 일본군 20사단 39여단 78연대소속 유전준부< 有田俊夫 > 중위가 이끄는 1개소대의 병력은 제암리를 완전 포위하여 한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는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하였다. 초가집으로 된 교회당에 주민이 모이자 일본군은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여 살육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고 아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교회당 밖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까지 끌어다 모아놓고,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으므로 누구의 시체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을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부락을 다니며 민가에 방화< 放火 >를 했는데 33동< 棟 >의 민가< 民家 > 가운데 외딴집 2채를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또 이웃한 고주리< 高舟里 >로 달려간 일군< 日軍 >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피살된 사람들은 안정옥< 安政玉 >·안정린< 安正璘 >·안종락< 安鍾樂 >·안종엽< 安鍾燁 >·안종환< 安鍾煥 >·안종후< 安鍾厚 >·안유순< 安有淳 >·안무순< 安武淳 >·안진순< 安珍淳 >·안봉순< 安鳳淳 >·안경순< 安慶淳 >·안필순< 安弼淳 >·안명순< 安命淳 >·안관순< 安寬淳 >·안상용< 安相鎔 >·조경칠< 趙敬七 >·조태성< 趙泰成 >과 그의 부인 김씨< 金氏 >·홍원식< 洪元植 >과 그의 부인 김씨< 金氏 >·홍순진< 洪淳晉 >·김정헌< 金正憲 >·김덕용< 金德用 > 등이었는데, 부인들은 남편의 죽음을 보고 통곡하다가 잔인한 일본군에게 총검으로 살해된 것이었다. 이웃 고주리< 高舟里 >에서도 김흥렬< 金興烈 >·김성렬< 金聖烈 >·김세열< 金世烈 >·김주업< 金周業 >·김주남< 金周南 >·김흥복< 金興福 > 등이 칼에 찔려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1982년에 이르러 유해< 遺骸 >의 발굴이 도의리 산< 山 > 31-1번지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표석< 標石 >을 세우고, 새로이 제암리< 堤岩里 >의 교회당 뒷산에 23위< 位 >를 합장< 合葬 >하였다. 또 1959년에 세워진 기념탑< 記念塔 >을 정비하고, 1983년에는 제암리사건< 堤岩里事件 >의 전시시설< 展示施設 >을 만들어 국민교육의 현장으로 활용케 되었다.



[승용차]
안산 - 발안간 39번 국도, 수원 - 발안간 43번 국도의 교차점 부근에서 남양호로 가는 302번 지방도로 약 1.5km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조암행 직행버스를 타고 발안에서 하차 (소요시간 1시간 10분 소요)
발안에서 조암방향으로 약 1.5km에 있음.
* 오산역에서 약 7km정도가 되며 오산-발안간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음.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