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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김응하장군묘비 - 광해군때 명의 발란시 용맹을 떨친 장군

by 넥스루비 2007. 8. 7.
강원 철원군 철원읍 화지9리 산1-1

김응하 장군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13년(1580) 철원군< 鐵原郡 > 어운면< 於雲面 > 하갈리< 下葛里 >에서 고려< 高麗 > 명장< 名將 > 김방경< 金方慶 >의 후손으로 태어났다.장군은 25세 때 무과급제< 武科及第 >하여 도원판관< 度原判官 >과 삼수군수< 三水郡守 >로 있으면서 국경지대< 國境地帶 >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광해군< 光海君 > 10년(1618)에 만주< 滿洲 > 여진족< 女眞族 >의 건주위< 建州衛 >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 明 >나라에서 조선< 朝鮮 >에 군사를 요청하자 김응하 장군은 광해군 11년(1619)에 도원수< 都元帥 > 강홍립< 姜弘立 >의 좌영장으로 명나라에 원군으로 가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적군 6만 명과 장렬히 싸우다 중과부적< 衆寡不敵 >으로 적병에게 포위되어 40세를 일기로 전사하였다. 이에 대한 공으로 광해군 12년(1620) 조정에서 영의정< 領議政 >으로 추증< 追贈 >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요동백을 봉< 封 >하고 처자에게 백금< 白金 >을 보내었다.묘정비< 廟庭碑 >(조증< 詔贈 > 요동백< 遼東伯 > 김응하< 金應河 > 장군< 將軍 > 묘비< 墓碑 >)는 현종< 顯宗 > 10년(1669) 6월 우암< 尤菴 > 송시열< 宋時烈 >의 글과 사헌부< 司憲府 > 지평< 持平 > 박태웅< 朴泰雄 >의 글씨에 문곡< 文谷 > 김수항< 金壽恒 >의 전서제자< 箭書題字 >를 곁들여 제작하여 숙종< 肅宗 > 9년(1683) 철원군< 鐵原郡 > 철원읍< 鐵原邑 > 화지리< 花地里 > 향교골< 鄕校谷 >(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역촌동)에 사당< 祠堂 > 표충사< 褒忠詞 >과 함께 건립< 建立 >하였다. 그후 사당은 6·25전란으로 소실< 燒失 >되고 묘비만 초야에 있게 되자 당시 3군사령관인 이세호< 李世鎬 > 대장이 1974년 11월 3군사 영내로 옮겨 봉안< 奉安 >하다가 철원군과 종중< 宗中 >의 이전 요구에 따라 1984년 4월 3일 환원되었으나 원위치 복귀가 불가하여 현위치에 봉안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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