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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 -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최초로 발굴된 유물. 금동관

by 넥스루비 2007. 8. 7.
신촌리 9호분에 대한 조사는 1917년 12월 17~27일, 1918년 10월 16~28일 두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고적조사위원회 곡정제일(谷井濟一)위원과 소장항길(小場恒吉), 소천경길(小川敬吉), 야수건(野守健)등 4인이 특별조사로서 행한 발굴조사가 처음이었다. 당시 9호분 이외에도 이 일대 6기의 고분이 24일 동안 발굴되었기 때문에 발굴이라기 보다는 유물수습에 목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17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쪽의 보고문이 실렸을 뿐 자세한 발굴조사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이 금동관은 1917년 12월 12월23일(일요일) 일본인 소천경길(小川敬吉)이 소장항길(小場恒吉)의 도움을 받아 갑관을 개봉한 후 을관의 깨진부분을 통해 개관하였다. 당시의 출토상태를 보면 머리부분에 금동관, 좌측에 큰칼 창, 화살촉(鏃)등을 두고 목과 팔부분에 각종의 옥류가 산재 다리부분에는 소옥 및 금동신발이 있었다.

고대한국의 관모(冠帽)는 문헌기록과 고분벽화에 의해 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신라 가야고분에서는 순금제 금동제 은제의 관모가 출토된 바 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것은 출토된 예가 매우 희소하다. 특히 백제의 것으로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기록이외에는 충남 공주 무년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이 유일하다. 이러한 관모나 관식은 지배층의 신분 표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이 금동관의 주인도 당시 이 지역의 상위신분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동관의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立飾) 3개를 테두리에 꽃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어 기본형태는 신라금관과 같으나 입식이 신라관의 출자형(出字形)이 아닌 복잡한 초화형(草花形)이어사 양식상 고식(古式)으로 보인다. 더욱이 내관인 모(帽)는 전북 익산 입점리와 일본 웅본현 국수정 강전선산고분(日本 熊本縣 菊水町 江田船山古墳)에서도 비슷한 예가 출토된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영산강유역에서 독특하게 꽃피웠던 옹관고분문화를 연구하는데 모두(冒頭)를 장식하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영산강유역 토착세력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옹관고분이 대체로 3세기 말에서 조영되기 시작하여 4~5세기에 크게 성행하다가 5세기 후반부터 백제계 횡혈식석실분이 수용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옹관고분의 변화상을 볼 때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호족이거나 정치체의 최고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러한 역사적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앞으로 복암리 3호분의 발굴결과 등 좀더 많은 조사와 연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후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최초로 발굴된 유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된 백제시대의 관모로서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예로 백제관모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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