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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 충의공엄홍도 정려각 -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자신의 선산에 묻은 충신 엄홍도의 충절

by 넥스루비 2007. 12. 21.
영월 호장 엄홍도는 어린 나이로 승하한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현 장릉)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 충신이었다.

엄홍도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때이며 고종 16년에 이르러서야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노산군이 서거한 지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에야 노산군의 묘가 복원이 되고 다시 182년이 지나서 숙종 24년(1698)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능도 봉릉이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인 현종9년(1668년)에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엄홍도의 복호(復戶)를 주청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다음해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후손들을 등용하였고 영조 34년(1758)에는 공조참판으로 추존하였고, 영조가 친히 제문을 내려 육신(六臣)과 함께 모시도록 하명하였다. 지금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와 문경의 의산서원(義山書院) 등지에서 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엄홍도의 정려각은 후손인 엄종한의 상소로 영조 2년에 청주에 세워졌는데 영조 35년에 영월읍 영흥1리 1069번지로 옮기고 1907년 엄병길 강원도지사 때 정려각이 허물어지자 지금의 위치인 장릉 화소문 안으로 옮겨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정려각을 건립하고 그 앞에다 홍살문을 세웠다.

정려각 안의 정려비(旌閭碑)는 순조 33년에 충신 엄홍도가 공조판서로 추증될때 비문을 가필했으며,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은 고종 16년에 비면의 앞면을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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