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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공영당 -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던 백성들에게 민족정기를 심어...

by 넥스루비 2007. 8. 7.
대구 동구 도동 766-4

이 건물<建物>은 최치원<崔致遠>의 영정<影幀>을 모시기 위하여 1912년 그의 후손<後孫>들이 세운 것으로, 그들의 시조<始祖>가 남긴 위업을 후손<後孫>에게 전하는 목적<目的> 외에도 이름난 선현<先賢>의 영정<影幀>을 모심으로서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래고 있던 백성들에게 민족정기<民族精氣>를 심어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 신라<新羅>때의 문장가<文章家>인 최치원<崔致遠>은 호가 고운<孤雲>이며, 당<唐>에 유학<留學>하여 당희종<唐僖宗> 6년 황소<黃巢>가 난<亂>을 일으키자 황소격문<黃巢檄文>을 써 이름을 떨쳤고, 28세때 귀국하여 벼슬을 받았으나, 난세<亂世>를 절망하여 명지<名地>를 유랑<流浪>하다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餘生>을 마쳤으며, 고려<高麗> 현종<顯宗>때 내사령<內司令>으로 증직<贈職>되고, 1020년 문창후<文昌候>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향교<鄕校>에 종사<從祀>토록 하였다. 건물<建物>은 원형<圓形> 초석<礎石>에 원주<圓柱>를 세우고 주상<柱上>에는 주두<柱頭>를 놓았으며, 쇠서의 돌출<突出>은 이익공계<二翼工系>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연화문<蓮花紋>이 복잡<複雜>하게 조각되어 매우 번잡한 형상<形象>을 보이고 있다. 어칸 솟을 지붕에는 주상<柱上>의 대량<大樑>위에 짧은 기둥을 세우고 주두<柱頭>를 봉두<鳳頭>와 익공장절<翼工裝節>을 하여 마치 중층<重層>처럼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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