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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 용을 보았다고 하여 관룡사라...

by 넥스루비 2007. 8. 7.
신라 진평왕 5년(583)에 창건되었다.
관룡사 창건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어 이를 사유사창설(寺有四創設)이라 하는데 신라 26대 진평왕 5년(583)에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하여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제자 천여 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량을 이루어 신라 8대 종찰(宗刹)의 하나로 꼽혔다 한다.

진평왕이 원효대사의 화엄경 법문에 홀연히 개심하여 이곳에 절을 세울 것을 명하는데 이날 근처에 안개가 자욱하여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더불어 칠성백일 기도를 마친 날 하늘(天界)에 오색 구름이 영롱하게 비치고 뇌성벽력과 함께 화왕산(火王山) 꼭대기 월영삼지(月影三池)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영롱한 오색구름을 타고 등천하는 것을 바라보고 이것이 곧 상서로운 일이라 기뻐하고 절의 이름을 용을 보았다고 관룡사 (觀龍寺)라 하고 그 뒷산을 구룡산(九龍山 또는 觀龍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일설엔 "東晋穆帝 永和 五年 乙酉"라 하여 신라 흘해왕(訖解王=訖解居師今, 310∼356) 40년(349)을 초창으로 보는 이도 있는데 이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년(528)보다 200년이나 앞서가는 연대가 되므로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의 창사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도에서 바다 건너 가야에 전해졌다는 남방불교도래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그 후 경덕왕 7년(748)에 추담선사(秋潭禪師)가 증건하고, 임진란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재건, 영조 25년(1749)에 보수했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觀龍寺一俱在火旺山」이라는 구절 뿐으로 간략한데 관룡사 사적기에는 이조 숙종 30년(1704) 가을의 대홍수로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다.

1712년 기타 당우를 재건하여 잇단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나 6ㆍ25동란때 관룡사 일대가 공산군의 집결소가 되어 U.N군의 폭격으로 이곳 팔상전은 전소하고 대웅전도 일부 파괴되었는데 1956년 해체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보존하고 있다.

대웅전과 팔상전의 역사는 이 절과 더불어 신라시대로 거슬러 오르나 오랜 세월동안 소실, 유실 등 온갖 곡절을 겪어 몇 번이고 중수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넓지 않은 대지에 대체로 남향하여 가람이 형성되어 있는데 지형상 가람 동남쪽의 입구를 돌아 경내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경내에는 남향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칠성각, 삼신당 등이 높은 대지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앞에 원음각이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에는 약사전이 놓이고 가람 양편에는 요사체를 두었다.

관룡사 안에는 관룡사 약사전(보물146호), 관룡사 대웅전(보물 212호) 관룡사 용선대 석가여래좌상(보물 295호) 관룡사석조여래좌상(보물 519) 관룡사원음각(문화재자료 1호) 관룡사부도(몬화재자료 19호) 관룡사약사전 3층석탑(유형문화재 제11호) 관룡사 석장승(민속자료 6호) 등 총 9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고려 공민왕때 개혁 정치를 주도한 신돈이 출가한 옥천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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