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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산성 - 가야시대에 축조된 신라의 성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조남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의 태뫼형 석축산성이다.
현 가야읍에서 남으로 약 2.5㎞ 거리에 있고 주민들은 조남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조남산의 상부는 동남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골짜기가 형성된 작은 분지 모양으로 산의 상부 사방이 높게 솟아 있다.

산성은 산의 정상부에서 비교적 높은 지형을 따라 남북으로 깊게 늘어진 장타원형의 모습이며 성벽의 총길이는 약 1.4㎞ 정도이다.
성 밖의 지세는 북서쪽은 급경사로 비교적 오르기가 힘이 든다. 그러나 남쪽과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오르기 쉬운 소로가 있고 성내로 출입이 용이한 지형이 있다.
성내의 지형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분지에 모인 물은 모두 동쪽의 얕은 골짜기로 흐르게 되어 있고 성 내부는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하여 경작되고 있다.
최근에 민묘가 몇 기 조성되어 있어 산성이 더욱 황폐해진 모습이다.

성산산성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창원 문화재연구소에서 성벽과 동·남문지 등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흙으로 덮여진 상태인데 성벽의 규모는 내벽 최대 잔존 높이가 2.8m, 외벽 잔존 높이는 4.8m로 잘 남아있는 성벽의 너비는 상부 약 5m, 하부 약 8m 정도이다.

자연 암반층을 성벽의 기저부(基底部)로 이용하여 30×50㎝ 크기의 장방형 모양의 할석들을 사용해서 내·외벽면을 비교적 수직되게 쌓아 올리고 큰 할석들 사이에는 작은 돌들을 끼워 마무리하는 고식적(古式的)인 축성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남문지 외벽에는 기단보축기법(基壇補築技法, 성벽의 바깥에 또 다른 벽을 쌓아 올린 것으로 성의 기저부 외면에 덧대어 쌓아올린 보조성벽)이 확인되었다.
한편 동쪽 외벽의 경우는 기저부를 커다란 막돌로 이용하여 쌓았으며 그 위에 판상의 할석으로 치밀하게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바깥으로는 이중의 기단보축이 설치되어 견고하게 축조되어져 있다.

성문은 모두 3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발굴조사에서도 남문지와 동문지가 실제 확인되었다. 남문지의 경우 체성너비가 860㎝, 문지(門址)의 바닥 너비가 450㎝로 점판암과 할석들로써 정연하게 쌓아진 모습이었다.
동문지는 성내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서문지는 붕괴되어 원형을 파악하기가 곤란할 정도이다. 또한 성내에는 우물이 현재 1곳 확인되고 있으나 수량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동문지 근처에 성내의 물을 가두어 두는 일정한 크기의 연못이 있었음직하다.

성내에서 확인되고 있는 건물지는 2곳으로 남동벽에서 약 5∼7m 정도 떨어진 곳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초석과 성내 중앙부 민가 뒤쪽 솔밭에 위치한 초석들이다.
전자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건물지로 추정되나 확실한 성격은 파악하기 어렵고 다만 이 초석들이 자연석을 약간 가공하여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사용한 것들로서 크기나 모양이 다양하고 성벽과 매우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에 성벽과 관련이 깊은 기능을 한 건물지로 추정된다.
한편 성내부의 발굴조사시 귀면와(鬼面瓦)와 연화문와당(蓮花文瓦當), 토수(吐首)기와등과 토기편 목제품, 과일의 씨앗류등이 다량 출토되어 앞으로 분석결과가 기대된다.

성산산성은 지리적 위치와 성벽의 축조기법 그리고 문헌기록 등으로 보아 되어 안라국(安羅國)의 중요한 시설로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귀면와와 연화문양 등으로 보아 아라국 멸망 이후의 신라시대에도 계속 성으로서 그 기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문헌 기록과 「대동여지도」등에 고적 또는 고산성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산성으로서의 그 기능이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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