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국내여행지/산성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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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군 음성읍 읍내1∼2리 산14-1 수정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고산성< 古山城 >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대동지지< 大東地志 >」에는 운성< 雪城 >이라 칭했으며, 「호서승람< 湖西勝覽 >」에는 수정산성< 水精山城 >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의 「문화재지< 文化財誌 >」에 고려시대 축성하고 조선시대 개축한 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의 서쪽 성벽< 城壁 >은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치성< 雉城 >은 전형적인 치성과는 개념이 다르지만 성벽의 회절부를 돌출시켜 쌓아 치성의 역할을 하게 하였는데 3개부분이 남아 있다. 산성의 높이는 높은 곳은 7m가 넘으며, 대략 2~3m정도의 높이로 성벽의 폭은 4m정도이다. 성벽을 따라 4~5m 폭의 회곽도< 廻郭道 >가 조성되어 있다. 석축법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온달산성은 고구려< 高句麗 > 평원왕< 平原王 >의 사위 온달< 溫達 >의 무용담< 武勇談 >이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산성의 이름이다. 이 성은 본디 언제 축성< 築城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에는 이미 성산성< 城山城 >으로 고적화< 古蹟化 >되었던 기록이 있다. 남한강< 南漢江 >을 굽어보는 요새지에 내외협축< 內外夾築 >의 석축을 한 소규모의 산성이지만, 성안에서는 삼국시대< 三國時代 >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한다. 특히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옹성적< 甕城的 > 돌출부 등은 우리나라 고대< 古代 > 성곽< 城郭 >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충북 충주시 직동 산24-1 이 충주산성< 忠州山城 >은 전설< 傳說 >에 의하면 삼한시대< 三韓時代 >에 마고선녀< 麻姑仙女 >가 7일 만에 축성< 築城 >하였다 하여 일명 마고성< 麻姑城 >이라고도 하며, 금봉산< 錦鳳山 > 즉 남산< 南山 >에 소재하여 남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산성은 석축산성< 石築山城 >으로 매우 험준한 지세< 地勢 >를 이용하여 구축된 요새이고 성내에서 삼국시대< 三國時代 > 이래로 산성으로서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의 주위는 약 1.2km이나 거의 무너지고 잔존부분은 약 300m 정도이며 성의 높이는 약 5∼6m 정도이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 산 1-4 대모산성은 낮은 구릉지에 평산성으로 축조되었으며 형식은 내·외성과 자성을 갖춘 특이한 형식의 포곡식산성에 속한다. 성내에서는 선사시대 이래의 석기와 토기가 수습되고 있으며 삼국사기 전투기사에 보이는 모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에 진천지역 호족인 임희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산성은 고대 강역과 산성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직후에 건립된 총 길이 7.6km의 가산산성은 팔공산 서쪽 자락인 가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고봉인 가산 바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구시 전경과 가산산성의 위품당당함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1640년 처음 내성을 축성, 1741년에 중성이 건립됨으로써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으며 사적 제216호로 지정돼 있다. 가산산성에 들어서면 성벽, 문루, 장대, 보루 등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어 등산을 즐기며 문화 유산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 힘들지 않은 등산로를 따라 동문, 중문을 지나면 해발 901m의 가산 바위에 닿는다. 가산 바위 바로 밑 등산로에 목을 축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샘이 있고, 가산 바위 바로 아래에서 펼쳐지는 경치는 가히 장관이라 말할 수 있다.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1 토성의 길이는 675m(동벽 185, 서벽 165, 남벽 155, 북벽 170), 높이 3.5m, 폭 8-13m, 문지 4개소, 곡성 12개(네모서리, 동서남북 각2개) 남문터와 북문터는 좌우의 성벽이 어긋나게 만든 것이 특징이며, 동·서문과 함께 4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곡성< 曲城 > 모양을 이루고, 이 네 모서리와 문터 사이마다 곡성의 모양이 있어서 모두 12개의 치성< 雉城 >을 두고 있다. 이 토성은 문헌상의 기록이 없었으나, 근래에 발견된 조선 영조 20년(1744)에 승려 영후< 靈休 >가 기록한『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이 토성 관련 기록이 있다. 신라말 호족의 시기에 궁예< 弓裔 >가 양길< 梁吉 >의 부하로 있다가 군사를 나누어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三國時代 > 백제< 百濟 >의 상당현< 上黨縣 >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km나 되는 거대한 포곡식< 包谷式 > 석축산성< 石築山城 >이다. 통일신라< 統一新羅 > 초기에는 신라의 서원소경< 西原小京 >이 청주지역< 淸州地域 >에 설치< 設置 >되었는데, 삼국사기< 三國史記 >에 김유신< 金庾信 >의 세째 아들 원정공< 元貞公 >이 서원술성< 西原述城 >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바,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현재의 성벽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때 수축< 修築 >되고, 숙종< 肅宗 >(1674∼1720, 재위)때 대대적인 개축< 改築 >이 되었으며, 그후 계속 수축된 것이 성문 무사석< 武士石 >의 명문< 銘..
인천 남구 문학동 산27-1외2필 이 산성은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정상부에 축조된 석성으로 미추홀 고성, 남산성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사강목》,《여지도서》등에 의하면 이 곳은 미추왕(비류)의 도읍지로서 석성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축조형식은 테뫼식으로 내·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성의 규모(둘레)는 총 577m로서 현존하는 부분은 339m이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부분은 220m이다. 전 구간이 거친 마름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석은 매 층마다 수평을 이루고 뒤로 올라가면서는 조금씩 퇴물림을 하였다.
경북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 171-1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독용산 정상에 위치한 독용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의 줄기에 쌓은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7.7㎞(높이 2.5m, 폭넓이 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천5백년전 성산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 순찰사 정중휘가 개축하여 동서남북 7개 포루, 아치형의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옛날 그대로 남아있고, 동서군량고가 있어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도 보관하였다...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 권신(權臣) 최이(崔怡)는 강화천도(江華遷道)에 앞서서 1232년(年) 영군(領軍)을 동원(動員) 하여 강화(江華)에 궁궐(宮闕)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築造)하였다. 그리하여 고려(高麗)는 몽고(蒙古)의 제2차 침입(侵入)이 있는 1232년 6월 16일 대몽항전(對蒙抗戰)의 기치를 들고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하였다. 그러나 왕궁(王宮)과 도성(都城) 및 관아의 시설이 완비(完備)된 것은 아니었다. 제도(諸道)의 장정(壯丁)을 징발하여 강화성(江華城)과 궁궐 및 백사공해(百司公해)를 본격적으로 영조(營造)하기 시작한 것은 1234년 1월부터이다. 이때 송도(松都)의 궁궐과 비슷하게 하여 산(山)의 이름까지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성(城)은 내성(..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8-1외 축성연대는 660∼663년 사이로 추정하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시 동학군의 기포지로 사용되었다. 1976년 4월 2일에 전라북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백산성지는 표고 47.4m인 백산을 중심으로 축성된 퇴뫼식 토축성으로 외성을 포함 4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토단 외곽에 목책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1성은 산정상을 평탄하게 다듬은 산상대지로서 최대 폭 25m, 길이 80m, 둘레 181.5m이다. 제2성은 제1성의 3m 아래에 테머리식으로 타원형으로 감았으며, 장축 길이 120m, 최대폭 60m(너비 8-12m의 회랑도를 두름)이다. 제3성(중성)은 둘레가 506m이고, 제4성(외성)은 둘레 1,064m, 장축길이 358..
전북 남원시 동충동 464-1 남원의 축성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통일신라 신문왕 11년(691)으로 추정된다. 서은 돌과 큰바위로 쌓은 것인데 둘레가 약 3.5㎞ 높이약 5.4m 성안에는 군사용 우물이 71개소 등 수많은 군사시설이 있었고 성밖에는 성을 둘러 길이 6m의 호를 파놓고 물이 흐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헐어져 없어지고 불과 일백여m가 남아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남원성은 정유재란때 경상도로부터 침공한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거느린 일본군을 맞아 혈전끝에 1만여명의 군,관,민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다. 또한 남원성은 1597년 정유재란시 함락된후 1692년(숙종18년)에 재축성 되었으나 동학농민 전쟁시 김개남 장군이 점령하여 운봉 민포구과 교전시 동문과 남문이 소실되고 일제때 시..
경남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대국산성은 현성(縣城)이었던 성산성에서 동북방향으로 설천면과 고현면의 경계지점, 해발376m의 대국산 정상에 있다. 산성으로 가려면 고현면 남치, 관당마을에서 가는 길과 설천면 정태, 내곡, 동비, 진목마을에서 가는 길이 있다. 이 산성은 머리만한 자연석를 사용하여 겹겹히 쌓아 올리고 내부에 흙과 자갈로 메워 토루를 만들어 직선형 성곽을 이룬 타원형 성곽이다. 형태나 지형적으로 보아 현소재지 가까이 있어 현성의 외곽성 역할을 한 것 같다. 평상시에는 성 아래에서 거주하다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고 공격을 하였을 것이다. 산성 성곽 위의 망루와 봉수는 외적이 침입할 때 감시와 경계구역으로, 중앙에 있는 건물지와 연못지는 지휘소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한 곳으로 쓰..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산 47 서상면 소재지에서 방지교를 건너 충혼탑이 있는 방지산의 9부능선상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여 성을 축조했다고 해서 "합미성"이라고 하며 또한 일명 '금당성'이라고도 한다. 또 함양군지의 지명편에 의하면 마을 앞산 봉우리가 연못에 떠 있는 연꽃 같다하여 꽃다운 못, 즉 '방지'라 이름하였다 한다. 현재 이 성의 성벽은 상단부가 무너져 성의 윤곽을 확인하기가 거의 어렵다. 45x30cm크기의 자연석과 활석으로 높이 3~4m정도로 축조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약 500m정도에 불과하다. 성내부 중앙에는 100x25cm 크기의 활석으로 쌓은 우물이 있다. 현재 성의 북쪽 최정상부에 높이..
경남 함양군 지곡면 창평리 산3 지곡면 창평리에 위치한 마안산(해발 507.8m)의 정상부에 가까운 9부능선상에 있는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1 함양군 산천조에 기록되어 있으나 춪조연대 및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산성은 현재 부분적으로 흔적이 남아 있으나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그 중 양호하게 남아 있는 남벽은 40x20cm크기의 자연석으로 축성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높이 2m, 길이 약 50m정도이다. 또 폭 2m의 서문지가 남아있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죽림리 산 308-1 함양군관 남원군의 경계지역에 있는 팔령치에 위치한 산의 9부능선상에 위치한 퇴메식 산성이다. 이 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1 함양군 산천조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석축한 성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 성은 성벽이 거의 무너져 있으나 서북쪽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채 남아있다. 60x15cm 정도의 자연석과 인공석으로 벽돌쌓기식으로 축조되었다. 북동쪽은 경사가 심한 편이나 넘서쪽은 비교적 완만해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서쪽에는 성 밖에서 안으로 오목하게 쌓아올린 서문지가 있다. 이 성의 둘레는 약 500m 넓이 약 2,000여평에 달한다. 성안 일부는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여기서 경질 및 도질토기편이 발견된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는 신라와 백..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지금의 수동은 원래 사근역원 자리였는데 이 산성은 수동면 소재지의 뒷편 연화산에 있다. 이곳은 함양군의 관문이며 서부경남에서 호남지방으로 가는 길목으로 거창, 산청 사이의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함양읍에 이르는 길이 갈리게 되므로 국도상의 삼거리로 냇물이 흐르고 있다. 수동앞의 남쪽으로 흐르는 이 내는 진주의 남강으로 흘러가는 경호강의 지류이다. 사근산성은 함양의 외성(外城)격인 동시에 남북 관통로의 중요한 곳이다. 삼국시대의 함양은 위치로 보아 신라, 백제의 접경이 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양국의 분쟁지역이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함양군 성곽조에는 석축의 둘레가 2,796척이라 하고 그 안에는 세개의 연못이 있으며, 성안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
경남 양산시 신기동 20 양산 신기리 산성(성황산성)[梁山新基里山城(城隍山城)] 양산시의 동북쪽에 있는 성황산(城隍山) 정상부위에 형성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이 산의 이름에 대해 권22 에 "성황산 재부 동북오리 진산(城隍山在郡東北五里鎭山)"이라 기록하였는데 군성(郡城)에서 기준한 방위와 거리를 고려해 볼 때 현재 산성이 남아 있는 이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성황산의 남봉 남측에 있는 성황사(城隍詞)에서 기인된 명칭으로 생각된다. 또한 에는 "성황산성 석축주사천삼백육십팔척 고육척 내유정육 지이 유군창(城隍山城石築周四千三百六十八尺高六尺內有井六池二有軍倉)"이라 하였다. 따라서 현재 신기동 산성 (新基洞山城)이라 부르고 있는 이 성은 그 명칭을 성황산성(城隍山城)으로 불러야 옳다고 본다...
경남 양산시 웅상읍 삼호리 산 2-3 우불산성(于弗山城) 남·북 양봉(兩峰)으로 이루어진 우불산(于佛山) 남봉의 정상부 외곽과 남동쪽의 곡부(谷部)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축조한 포곡식(包谷式) 석축 산성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산을 '산성', '산성안', '성비알'로 부르고 있다. 성내의 지형은 정상부위가 평탄한 반월형상의 대지상이고 그 외곽은 급경사를 이루며 남동 장변의 중간부위에는 얕은 곡부가 형성되어 있다. 성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따라 조성되어있는데 남·북 성벽과 서 성벽은 정상부의 외곽을 따라 축조하였고 동 성벽은 곡부로 이어지는 능선의 척부(脊部)에 축조한 포곡식이다. 현재 동 성벽의 중간부위인 곡부에는 관음정사(觀音精舍)가 자리해 있다. 현재 성벽은 모두 붕괴되어 원상을 유지한 부분은 찾아..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산 153-2 함양군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는 능선을 따라 하나의 계곡을 감싸면서 형성된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위치가 영호남의 관문으로 전라도의 장수, 진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점과 구조로 보아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고 백제와 대결하게 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성으로 성곽의 총 연장은 2.75Km이다. "동국여지승람"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안의면) 성곽조에 따르면 둘레가 29,240척이고 성 안에는 시내와 군창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성 가운데로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前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적을 방어하기 위..
경남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산 102번지 경상남도 기념물 150호 지정돼 있다. 가락국 수로왕때 축조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해발 215m 정도의 산봉우리 정상부에 만들어졌으며 자연을 잘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동쪽과 북쪽 일부는 천연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했으며 서쪽과 남쪽에만 돌담을 쌓았다. 성벽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타원형이며 서쪽의 허리부분이 잘록하게 들어와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산성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산 229-1 이 산성은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 朝鮮 > 숙종< 肅宗 > 35년(1709) 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 > 윤숙< 尹淑 >이 병영을 건설코자 4문의 기초공사를 시작하고, 성벽축조를 위한 석재를 모으며, 수구문< 水口門 >을 축조하던 중 때마침 거듭되는 흉년과 질병이 만연되어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어 중지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북문과 수구문 터는 축성을 시작하여 공사하던 옛모습 그대로 흔적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朝鮮時代 > 축성< 築城 >의 기법과 공사의 순차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북문터의 부분이 전체의 성터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안팎의 아치문을 무사석< 武砂石 >과 부형< 缶形 > 무사석으로 만든 수법과, 내외겹축< 內外夾築 >..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 39-1 가곡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양동산성은 남해안 고속도로에 인접한 해발 331미터의 산 정상에 위치한 가락국의 흙과 돌로 된 산성이다. 석축의 높이는 2.5미터, 너비5미터, 둘레 약 800미터이다. 이 성은 김해에서 중서부 경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킨 곳이며, 이 산성의 아래 자락에 최근 발굴된 양동리 고분군이 있다. 마현산성은 가락국의 산성이라 전해진다. 이 성은 아름다운 무척산의 지형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데, 동북쪽은 천연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남서쪽은 성을 쌓았다. 현재는 대부분 무너져 버렸으며, 높이 2미터, 둘레 600미터이다. 추측컨대 이 성은 수로왕과 허왕후의 전설이 서린 천지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성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울산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이르기를 단조성(丹鳥城)은 언양관문의 남쪽 13리의 축서산에 있다. 석축의 둘레가 4,050자이며 지금은 폐지되었고 안에 못이 10"이라 하였다. 순조 31년(1831)에 만들어졌던 경상도읍지 속에 수록된 언양읍지(彦陽邑誌)의 성지(城池)에도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아래와 같다. 단조성 또 말하기를 단지성(丹之城)이라고도 하며 고을의 남쪽 13리의 축서산 위에 있다. 안에 천지(天池)가 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비가 와도 물은 더하지 않다. 돌성의 둘레는 4,050자인데 언제 쌓은 지는 알 수 없으며 서북쪽은 모두 허물어졌고 동남편은 옛과 같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바라보고 이르되 조선에 성이 없으랴마는 이는 잃을 수 없다 하였다. 박..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정 신라초기의 굴아화현(屈阿火縣)에 관한 일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신라 파사왕이 굴아화촌(屈阿火村)을 취해서 여기에 현을 둔 것이 굴아화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의 기록은 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함을 요한다. 옛 울산군의 전역을 영유하였던 것으로 보는 우시산국을 이미 탈해왕 때 정복하였는데 또 파사왕이 굴아화촌을 취하였다는 것과 신라의 주, 군의 제도를 시행한 것은 지증왕 6년의 일이었으므로 현을 두었다는 것은 서로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사왕의 치현설(置縣說)은 탈해왕 때 복속한 곳에 이를 지키기 위한 요새격인 성을 파사왕 때 쌓은 것이 굴아화현의 치현인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문수산의 산정에 있는 이 ..
울산 중구 다운동 울산시 다운동과 범서면 구영리의 경계에 있는데 태화강 쪽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 성은 규모가 작고 지표에서는 신라토기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생각컨데 초기의 굴아화부족들이 다전 마을 일대에 있다가 뒤에는 굴화리 쪽으로 옮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때의 이동이란 중심적인 치소를 말할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범서산성은 다전시대의 굴아화부족을 위한 산성이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 33외 6필 이 성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 頂上部 >와 계곡< 溪谷 >을 이중< 二重 >으로 두른 석축산성< 石築山城 >이다. 내성< 內城 >은 산의 윗부분에 둘레가 10리나 되도록 쌓았는데, 절벽이 험한 곳은 천연< 天然 >의 성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따로 쌓지 않았다. 외성< 外城 >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km나 된다. 고려시대< 高麗時代 > 이전부터 있었던 성터로 고려 말기에 왜구< 倭寇 >의 침입 때 보수하여 선산< 善山 >·인동< 仁同 >·개령< 開寧 >·성주< 星州 > 등의 백성들이 성에 들어와 지키게 하였다. 조선< 朝鮮 > 태종< 太宗 >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크게 고쳐 쌓았으나, 외민족의 침..
경북 구미시 장천면 상장1리 산 42-2 이 산성< 山城 >은 신라< 新羅 >의 시조< 始祖 > 박혁거세< 朴赫居世 >가 처음 쌓고,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장군< 將軍 >이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 전해오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 성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자연할석< 自然割石 >을 이어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형식대로 쌓았다. 둘레가 1km를 넘고 성안이 넓으며 우물 하나와 연못 2개가 있었다. 이웃한 금오산성< 金烏山城 >이나 가산산성< 架山山城 >과 더불어 의각< 椅角 >의 형세를 이루어 옛 인동현< 仁同縣 >의 읍민< 邑民 >을 난리로부터 보호하여 왔던 곳이다. 현재의 성벽과 문터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으로 새로이 이 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수축되어 선조< 宣祖 >..
경남 창녕군 남지읍 고곡리 산193 가야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했던 것을 조선선조 25년에 곽재우가 왜군과 접전키 위해 개축한 산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때의 격전지로 유엔군이 승리한 성이기도 하다. 산의 동부 6부 능선을 타고 서남으로 향하면서 타원형을 그리고 있고, 성벽은 토석혼합으로 사다리꼴로 쌓았다. 형태는 잔존하지만 무너져 내려 석재가 혼란한 데, 연대나 유래를 살필 만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경남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산5 신당마을 뒷산 소구릉상에 서향으로 축조 원형의 퇴뫼식 산성으로, 붕괴되었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남아 있다. 지방민들이 이 성을 목마성이라 불러 오는 것으로 봐서 한때 말을 키운 듯하나 기록이 없어 불확실하다. 다만 계성이 옛 현의 소재지이므로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해 줄 따름이다. 내외면 모두 경사 아래 부분을 토석으로 받쳐 쌓은 흔축성이나, 경사가 심한 곳은 냇돌과 약간 치석한 듯한 화강석으로 받쳐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