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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안동하회마을 (17)
국내여행 Travel
도산서원은 한국 유학사의 큰 별이며 해동주자(海東朱子)라 불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예부터 선비들이 한번쯤 찾아 보기를 소원하던 곳이며,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조선 선조(宣祖)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림들이 상덕사(尙德祠)(보물 제211호)란 사묘(祠廟)를 지어 그를 향사(享祀)하였고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으며,선조 8년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안동지방에는 유달리 서원이 많다. 하회 류씨에 의해 서애 유성룡 선생과 아들 류진을 모시는 병산서원,의성 김씨의 사빈 서원, 안동 권씨의 도계서원, 배향문제로 시비가 일었던 호계서원, 고산..
하회탈과 하회별신굿의 대명사격인 하회(河回)마을은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의 방문으로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된 바 있다. 풍산 류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곳으로 조선시대 학자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회탈뿐 아니라 한옥 등 전통문화가 잘 보존돼 있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주변 경관도 빼어나다. 마을 이름대로 낙동강물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안온한 분위기를 준다. 강변 백사장과 소나무 숲도 마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휴일이면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마을 민박집과 숙박업소가 있어 묵어가는 데 어려움은 없다. 여름에는 강가에 텐트를 쳐도 된다. Hahoe Village in Andong by adamgn Hahoe Villag..
명종 22년(1567년) 서애 유성룡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겸암은 이 곳에서 도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부용대 상류의 언덕에 있다. 이 건물은 강줄기가 마을에서 가장 멀리 휘도는 높은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많이 떨어진 곳으로 지금도 가기 힘든 외진 곳에 속한다. 건물 구조는 2층 누각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식의 누 마루를 둔 5양(梁)집이며 장대로 마감한 높은 축대 위에 세워졌다. 일자형 평면이며 길이가 4칸에 너비가 2칸이고 큰 방은 2칸으로 서편에 있다. 안채는 동단에서 꺾인 ㄱ자형집이며 길이가 6칸이고 너비가 4칸 크기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우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승(僧) 탄흥이 10년동안 시주를 거두어 선조 19년 (1586)에 완공하였다. 임진왜란 후 은퇴한 선생께서 이곳에서 징비록을 구상,저술하였다. 이곳은 넗은 대(臺)를 이루며 여러채의 집을 지어 앞서 지었던 원지정사나 빈연정사와는 그 큰 규모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동쪽 6칸은 일자대문채를 두었고, 바로 일자형 안채를 동향해서 앉혔다. 안채는 부엌은 한가운데에 두고 그 양편에 방을 두었다. 이지역에 전래하는 민가의 한 기본형인 도투마리집과 규모를 같이 하는점이 주목된다. 구성을 보면 대문, 안채, 사랑채 그리고 별당을 둔 격이 되었으므로 여염 대가집의 배치를 재현한것이다. 사랑채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며 남촌을 대표하는 곳이다. 문충공이 삼칸 초옥인 농환재에서 별세한 뒤 청백하게 산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장손인 졸재 원지공이 처음 창건하였고 그들 아들에 의하공이 확장 중수한 조선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집이다. 충호당 전서체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우의정 미수 허 목의 친필이다. 충효당이란 당호는 서애의 증손자인 익찬 벼슬을 역임한 우눌재 류의하대에서 게판되었으며 기문은 식산 이만부에게 청해 완성한 것이다. 모두 52칸이 남아있다. 남북이 조금 길고 동서가 그 4/5정도가 되는 사각형 터전에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랑채가 전면에 독립되어 있고 사랑채가 안채의 앞쪽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지닌다. 그런 까닭..
하회마을에는 처음 정착한 허씨 때부터 성황신을 받드는 상당(화산 중턱)과 하당(국신당, 화산자락) 그리고 삼신당(마을 중심에 있는 고목인 느티나무)이 있었다. 이들 세 곳의 당에는 정월 보름날마다 정기적으로 동제를 모셔 오고 있고 700여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별신굿은 무당이 주관하는 무속의 일종인데, 양반이나 선비들은 원래 무속을 배척해 왔기 때문에 풍산 류씨들은 별신굿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행사에도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다. 동제의 주관자를 산주(山主)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산주는 풍산 류씨들이 맡지 않고 있다. 하회마을에 사는 서민들은 양반으로부터 소외당한 한을 별신굿을 통해 토로해 왔다. 아울러 별신굿에서는 일종의 세태풍자도 있었던 것 같다. 별신..
풍산류씨의 대종택 입향시조인 전서공(典書公 柳從惠, 겸암의 6대조)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입향 당시 처음 지은 건물이 아직 사랑대청 건물로 남아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13세기말에 지어졌다고 하니 하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제일먼저 터를 잡은 건물이자 종택답게 명당을 차지하여 하회에서 보기 드물게 정남향(癸坐丁向)을 취하고 있다. 1500여평의 대지 위에 대종택다운 위치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조선조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사랑채 정면의 입암고택(立巖古宅)이란 현판의 입암은 겸암공의 부친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영)을 일컬으며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는 겸암공 6대손인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이며 현판은 근세사람 최동진(崔東鎭)의 자필이다. 99칸으로 전해오지..
병산서원은 1613년(광해3년)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조선중기 문신으로 류성룡의 문하)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존덕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겼다. 1610년에는 풍악서당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62년(현종3년)에 서애의 세째아들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년) '녕산'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1868년 대원군 선원 철..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39-2 이 집은 서애 후손으로 예천 용궁현감을 지낸 류교목(柳敎睦)이 1836년(현종 2년)에 건축하였는데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집이다. 하회 동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하동고택이라 부른다. 최근에는 행정당국에 의해서 '하회마을 선비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하회마을을 찾아 조선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거리를 갖게 해 준다. 겸암의 후손으로 신구학에 일가를 이룬 우천 류단하(友川 柳端夏, 겸암 14대손)옹이 거주하고 있는데 1953년 류공의 아버지 류시익(柳時益)이 인수한 것이다. 남촌의 중심에서 북촌으로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길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들이 각각 독립되어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안동(安東)의 옛 지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가(永嘉)이다. 안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고창군(古昌君, 古昌郡)으로 개명된 후 고려 태조 13년(930년) 후삼국의 쟁패기에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곳 병산(甁山)전투에서 이 지역 호족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의 노력으로 견훤(甄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움으로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영가군으로 개칭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의 향토지를 일러 '영가지'라 하고 안동출신 인사들의 모임을 '영가회'라 이름붙일 정도로 이 고장 사람들은 특히 '영가'라는 옛 지명을 쓰기 좋아한다. 영가의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나 영가의 아랫쪽에 터를 닦은 하회(河回)나 모두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24 정조 21년(1797) 형조좌랑 류기영이 건립한 집인데 1954년 화재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그리고 사당만 남아있다. 남촌을 대표한다는 이 집은 원형이 아름다웠다고 하며 건물도 건물이지만 도서와 골동이 수없이 많았다는데 화재와 함께 상당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한다. 주인 류태기(柳泰基, 70세)씨는 일본에 거주하므로 늘 문이 잠겨져 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72 북촌 마을 서쪽 끝에 자리잡은 동남향의 一자집으로 류도관공의 호를 따서 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리웠다. 현재는 주인 류시주(柳時柱, 서애 13대손, 53세) 가옥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초에는 2동으로 구성되었으나 1934년 갑술 대홍수로 유실되고 지금과 같이 一자형 안채만 남아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반 크기의 이 집은 서쪽부터 부엌 1칸반, 안방 1칸, 대청 1칸, 건넌방 1칸을 두고 이들 앞에 퇴간을 두어 마루로 연결되고 있다. 건넌방 동쪽에는 1칸반의 사랑방이 있는데 건넌방과 사랑방 경계를 따라 앞마당에 낮은 담장을 쌓아 안마당과 사당을 나누므로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을 함께 가지도록 하였다.그래서 사랑방 손님과 안방의 부녀자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하회탈은 넓은 의미로 하회탈과 병산탈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허도령은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한다. 집안이 가난함은 물론 엄격한 부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는데 우연히 이웃집 처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장가들지 못하고 번민하던 중 꿈에 집안에 금줄을 치고 신이 계시한 열 두 개의 탈을 완성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성심성의껏 탈제작에 임했다. 그 일에 몰두한 지 수 개월 만에 열 한 개의 탈을 제작하고 열 두 개째인 이매탈을 제작할 찰라에 허도령을 사모하던 안씨 처녀가 궁금한 나머지 어느날 밤 담을 넘어 문구멍으로 그 광경을 들여다보자 이상하게도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오랜 역..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27 겸암 류운룡 선생이 선조 16년(1583)에 세워 서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원지정사와 동,서로 상거해있고 약간의 거리가 있다. 본래는 원지정사 서쪽에 있었던 것을 150m 떨어진 서쪽으로 옮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 2칸은 온돌방인 것이 특징이다. 집은 길이가 3칸에 겹집이며 동쪽 2칸은 온돌이고, 서쪽 4칸은 대청이다. 대청의 전면은 문호없이 개방되어있다. 사주(四周)에 토담을 둘렀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261 서애 류성룡 선생이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한 임진왜란 친필 회고록이다. 징비란 시경(詩經) [소비편]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지난 날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서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7년 동안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왜란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결과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의 사신 왕래, 부산 동래의 함락, 상주의 패전, 서울과 평양의 함락, 이순신의 승전, 의병의 봉기, 정유재란의 과정을 밝혀 놓은 것이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趙壽益)공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1647년(仁祖 25)16권 7권을 간행하였다.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9 이 집은 서애의 증손 류만하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 주일재 류후장(主一齋 柳後章, 1650∼1706)공이 증축한 것이다. 하회마을 남촌 충효당 뒷편의 골목에 면한 남향집으로 사랑채, 문간채, 안채, 광채, 사당채를 세우고 담장을 방형으로 둘러치고 사이사이에 사잇담을 쳐서 여러개의 마당을 이루고 있다. 정남향을 향하고 전체 대지 모양은 남쪽 저변이 좀 길고 북쪽이 짧게 되어 있어서 사다리 꼴이다. 사랑채 앞에는 넓은 뜰이 있다. 사랑채은 一자형으로 정면 4칸에 측면 1칸이다. 절반이 사랑방이며, 절반이 대청이다. 사랑채는 사이에 중문을 두고 아랫채와 연결되어 있다. 아랫채는 방 2칸에 불때는 아궁이가 붙어 있어 대문간에 접하고 있다. 안채는 중문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06 집은 위치로 보아서 북촌의 중심에 위치한다. 또한 지금 그 안채가 소실된 남촌댁(南村宅)과 함께 한때 하회전통을 대표할 정도로 유명하다. 99칸 중 현재 54칸이 남아있다. 마을 중심부 북촌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주인 류영하(柳永夏, 74세, 서애 14대손)의 고조인 석호 류도성(石湖 柳道性)공이 1986년(철종 13년)에 경상도 도사를 지내면서 건축한 것으로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7칸의 대문간에 높이 솟은 솟을대문과 왼쪽으로 약간 비켜서 본채의 대문(중문)이 있고 그 좌우에 사랑채 방과 대청이 놓여 있다. 중문 오른쪽에 사랑방 2칸과 대청 1칸이 나란히 있고 안채로 꺾이는 곳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