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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Travel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번지 신복사(神福寺)라는 절에 남아있는 유물. 높이 4.55 m의 화강석으로 된 석탑. 넓은 4각형의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운 형식이다. 기단부는 넓은 지대석 상면에 24개의 연꽃잎이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고 하층기단 면석(面石)에 안상(眼象)을 새겨 고려 초기 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각 1석씩으로 조성, 상층기단 면석과 각층 탑신석 밑에는 별석(別石)의 괴임돌을 놓아 고려시대 석탑의 특수양식을 표현하였다. 초층 탑신에 감실(龕室)을 음각. 옥개석 받침은 3단. 각 탑 옥개석의 추녀 끝이 하늘을 향하게 들려있고, 2층부터는 탑의 몸체 높이가 위로 갈수록 점점 낮아져 뾰족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 복발(..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번지 높이 121cm, 대좌높이 22cm의 화강석 불상. 탑을 향해서 공양(供養)하는 모습의 보살상이다. 보살상은 복판앙련(複瓣仰蓮) 대좌 위에 있는데 탑을 향해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발은 꿇어 앉아있다. 왼팔은 왼쪽 무릎에 걸치고 있으며 오른손과 맞잡아 가슴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보관(寶冠) 위에 8각의 천개(天蓋)를 씌웠다. 얼굴은 부드럽고 복스러우며 미소를 담고 있다. 길게 드리워진 눈썹, 살이 빠져보이는 눈, 넙적한 코가 잘 표현되어 있다. 입은 꼭 다물었지만 함몰되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귓볼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귀걸이를 장식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비대하고 풍만한 체구,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등에서 ..
강원 강릉시 교동 238-3번지 강릉지방에서 나온 인물 가운데 주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분들을 모신 사당. 향현사(鄕賢祠)는 조선 인조 23년(1645) 강릉부사 강백년과 김충각, 김성원 등이 논의하여 읍성의 동문 밖에 건립, 고종 4년(1867) 강릉지방의 대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이후 복구의 노력이 있었으나 동왕 5년(1868)에 비사액서원의 철폐령으로 좌절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1년 봄 후손들에 의해 건립, 1995년 황영조 기념체육관건립으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조은 최치운, 수헌 최응현, 삼가 박수량, 사휴 박공달, 원정 최수성, 도경 최운우 등 향현 6인을 모시었다. 순조 8년(1808)에는 춘헌 최수, 눌재 이성무, 괴당 김윤신, 농헌 박억추..
강원 강릉시 교동 725-2번지 신라 김유신 (595~673) 장군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으로 화산사 또는 흥무왕사(興武王祠)라고도 한다. 정면3칸, 측면2칸, 단층맞배지붕형식. 신라의 삼국통일 후 문무왕 4년(664), 말갈족이 빈번히 침략하자 김유신 장군은 왕명을 받고 이를 퇴치하고자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머물게 되었다. 장군은 화부산(花浮山) 부근에 주둔하면서 훈련을 강화하여 말갈족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여 국경지였던 명주지방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감복한 백성들은 감사히 여겨 장군이 죽은 후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화부산사(花浮山祠)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종 21년(1884)에 영남후손 홍두의 주선으로 중건..
강원 강릉시 운정동 179번지 충무공(忠武公) 최필달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곳. 강릉 최씨의 시조인 최필달은 고려 태조 왕건의 창업을 도운 개국공신. 당시의 학문을 정립하고 예를 가르친 문무를 겸한 학자로서 해동부자(海東父子)로 숭앙받기도 하였으며, 작호를 강릉의 고호(古號)인 경흥부원군으로 받아서 후손들이 강릉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있다. 1936년 최명수 등 후손들과 진사 정채화 등이 최필달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 사당을 황산사비와 함께 남문동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근처에 주택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최씨 종중에서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경내의 문정묘(文正廟)에는 인종 원년(1544)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문정공(文正公) 최수성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최수성은 문장(文章), 서법(..
강원 강릉시 저동 293번지 신라의 일등공신 충렬공 관설당 박제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후손인 박원동 등이 성금을 모아 1939년에 건립하였다. 정면3칸, 측면2칸, 단층맞배지붕. 박제상은 파진찬(婆珍飡) 물품(勿品)의 아들로 삽량주(지금의 양산) 간(干)으로 있을 때 눌지왕의 일가를 구출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아우 복호를 데려오고, 일본에 가서 볼모로 잡혀 있는 왕자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케 하나 자신은 일본군에게 체포, 목도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박제상의 부인은 그를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경양사는 외문과 중문의 이중구조이며 '경양사(鏡陽祠)'라는 현판과 후손 박원동이 쓴 "경양사기"라는 현판이 있다. 중문 밖에는 재실이 있고 그 안에는 박원동의 ..
강원 강릉시 저동 433번지 경포호 동북쪽 깊숙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 정면2칸, 측면2칸, 단층팔작지붕. 원래 이곳은 조선 명종 때 별감 장호가 지어 자신의 호를 따 '태허정(太虛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후 태허정은 소실, 장호는 조카사위 김몽호에게, 김몽호는 그의 아들 득헌에게, 득헌은 그의 사위 신만에게 이 정자터를 증여하였다. 그후 대학자인 삼연(三淵) 김창흡이 약 1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론하자 신만의 아들은 그를 위하여 초가를 지어 거처하게 하였다. 김창흡은 숙종 45년(1718)에 널리 명성을 떨친 학자로 경포호의 경치에 감탄하여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 26년(1750) 이 초가는 화재로 소실된다. 영조 30년(1754) 신성하의 손자인 진사 신정복은 강릉시 죽헌..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번지 오죽헌 시립박물관 강릉시 옥천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무진사(無盡寺), 용지사(龍池寺)라는 절이 존재하였다. 현재는 사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당간지주만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시립박물관에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여기에 있었던 불상으로 1992년에 오죽헌 시립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총 높이 178㎝, 두고 37㎝, 두폭 24㎝, 견폭 48㎝, 흉폭 32㎝. 불상은 대좌(臺座)와 신체가 별석(別石)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대좌는 지름 147㎝, 높이 47㎝ 크기의 원형으로 단엽(單葉) 13판(瓣)의 복련(覆蓮)이 돌려져 있다. 오랫동안 풍우로 훼손되어 머리와 몸체가 2조각 나있던 것을 시멘트로 수리하였다. 원만한 타원형의 얼굴에 이마에는 백호공이 있..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 번지 오죽헌 박물관 선정비란 관원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로 역대 강릉부사 및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워주었다. 강릉시내 곳곳에 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수합, 명주군청에 복원하였다가 1954년 9월에 강릉도립의료원 앞 남대천제방으로 옮겼다. 보존상태와 위치가 적합하지 않아 1986년 강릉시 문화유산 정비사업으로 경포대 서쪽에 옮겼으며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현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을 신축한 후 사적관 앞뜰로 선정비(善政碑)들을 모두 옮겨 세웠다. 모두 19기로 그 중 특이한 것은 인조 6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던 이명준이 세운 "충노문리동행적비(忠奴文里同行績碑)". 임진왜란 때 굶주림 속에서도 부사(府使)의 목숨을 구해 준 충직한 노비(奴婢) 문리동의 행적을 기리..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번지 오죽헌 시립박물관 1965년 강릉시 임당동 139번지에서 도로확장 공사 중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견. 귀부(龜趺)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나의 돌로 되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귀갑문(龜甲紋)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돌기선을 중심으로 좌우 각 2개씩 세로 방향으로 배치. 배면(背面) 중앙에는 비좌(碑座)가 가로 45.5cm, 세로 23.5cm, 깊이 16cm의 장방형으로 있다. 비좌의 하단에는 조각의 흔적이 없으며 목이 짧고 얼굴은 평판적으로 몸체와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얼굴은 눈, 코, 귀, 입이 얇게 조각되어 있으며 턱밑에 수염은 역삼각형으로 조각했다. 발은 4개의 발가락으로 묘사되었는데 앞발은 돌출되어 있으나 뒷발은 움추린 모습으로 파손되어 있고, 꼬리는 오른쪽..
부산 북구 금곡동 1. 행군수손후상일휼민선정비(行郡守孫候相馹恤民善政碑) 이 비석은 1873년에 세워진 것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공덕9功德)을 담고있는 송덕비이다.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냇가에 모래벌판 펼쳐져 우리 경내 백성들에게 병폐가 되었네 관곡을 대어 세금을 대신하였으니 정사(政事)를 폄에 인(仁)으로써 하셨도다. 2. 행군수이후계필청덕휼민비(行郡守李候啓弼淸德恤民碑) 이 비석은 광무 6년(1902)에 동원지사가 세운 것으로, 수참(水站)동원진에서 참부(站夫)로 종사하던 공천(公賤)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준 공덕(功德)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길마다 돈을 깔고, (은택을 고루 베풀고) 재물을 내어 병폐를 고치셨네. 밀린..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번지 오죽헌 시립박물관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보살상으로 높이가 56㎝인 대리석 불상. 강릉 한송사가 해일로 모두 소실된 후 구정면 어단리에 있던 것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1992년에 강릉시립박물관에 옮겨와 보관하고 있다. 원래 한송사지에는 이 불상과 동일한 양식의 보살상이 1구 더 있었는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한일협정으로 반환되어 국보 제124호로 지정,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불상은 특이한 자세와 풍부한 입체감, 사실적인 조각수법 등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왼팔은 안으로 꺾어 왼쪽 다리에 얹고, 바른팔도 똑같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분실되어 정확한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이 불상은 왼쪽 다리를 안으로 넣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내어 발을..
강원 강릉시 노암동 740-4번지 조선 인조 5년(1627)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재의 건물은 1927년에 정묘생(丁卯生)의 동갑계에서 최명익 등이 강릉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라 전한다. 단층 팔작지붕 정자형의 건물. 정각을 정자형으로 지은 것은 정묘계(丁卯契)를 상징하기 위함이다. 동갑계 20인이 회갑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기는 하나 당시 일제가 강릉공립보통학교를 세우기 위해 강릉객사를 허문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객사의 재목과 기와를 옮겨와 지은 소중한 건물이다. 이 정자에는 벽이 없고 난간과 마루가 있다. 해서체와 전서체의 해강(海岡) 김규진의 오성정(五星亭) 현판과 석촌거사(石邨居士)의 오성정(五星亭) 현판 등 2개의 현판이 있다. 바로 옆에는 1980년 9월 9일 한종희가 감역한 "五星..
경주시 암곡동 왕산마을의 깊은 산골에 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는 뜻에서 무장사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고 한다. 절대 전쟁을 하지않고 병기가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장사는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그의 숙부인 문무왕을 추모하여 세운 절이다. 절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삼층석탑만이 홀로 절터를 지키고 있다. [승용차] *경주에서 4번 국도를 타고 감포방향으로 가다 보문단지 도토락월드에서 좌회전해 조선호텔까지 간다. 호텔에서 암곡동 방향으로 계속 가면 왕산마을이 나오는데 마을에서 산길로 2km쯤 가야한다. [대중교통] *경주시내에서 왕산마을까지 2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아침 6시45분 터미널 출발)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 1637년(인조15)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화의를 맺는 등 어수선한 세상을 떠나 탐라로 향하던 고산이 이곳 부용동에 들어와 맨 처음 터를 잡은 곳이 낙서재이다. 부용동에 들어와 1671년 85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일곱차례나 드나들며 12년여 머물었던 이곳 부용동. 부용동에서 고산이 주로 생활한 공간은 격자봉(格紫峯, 435)의 혈맥이 세번 꺾어져 내려오면서 소은병(小隱屛)이란 바위가 있는 이곳 바위 밑에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후에 잡목을 베어 세칸 집을 지었으니 낙서재(樂書齎)였다. 낙서재는 사방으로 퇴를 달아 매우 컸다. 1653년 2월 낙서재가 남쪽에 잠을 자는 한 칸 집인 외침(外寢)을 짓고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뜻에서 무민당(無愍堂)이라는 편액을 단다. 무민당도..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삼보사찰 가운데 그 수위를 차지한다. 창건이래 천 수백년간 법등을 이어오는 동안 국보1점, 보물11점, 지방유형문화재 34점등이 보관되고 있다. 원래 이곳의 부도와 석비들이 산내각처에 흩어져 있다가 신앙과 보존적 차원에서 한 곳으로 모아 일괄 봉안하여 그 이름을 부도원이라 하게 되었다. 이 곳 부도원에는 현 대웅전의 중건주 우운당 진희대사 부도를 비롯한 역대 선사 50분의 부도와 일주문 밖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본사 사적비, 부도비, 공덕비 등을 함께 옮겨 모셨다. 부도를 옮길 당시 발견된 귀중한 사리용기는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들 석조부도와 석비들은 모두 통도사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 자료..
경북 경주시 인왕동 통일 신라시대 포석정과 더불어 연회장으로 쓰이던 곳. 지난 1975년 본격적인 발굴작업 결과 원래 이름은 월지(月池)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은 신라때 있었던 궁궐이 폐허가 되고 이곳이 마치 늪처럼 변하여 오리와 기러기만 노닌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1975년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기 전 이곳은 흔한 연못의 하나였다. 발굴 결과 3만 점에 달하는 신라시대의 유물과 26개소의 궁궐, 건물터 등이 출토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원지'와 동궁(東宮)인 '태자궁'이 바로 이 곳이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연대와 관련하여서 신라 문무왕 14년(674년) 설과 문무왕 19년(679년) 설이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발굴..
자경전 뒤뜰에 샛담의 일부분을 굴뚝으로 만들고 뒷마당을 향하는 외벽 중앙부로 장방형으로 구획하여 여러개의 벽돌로 십장생무늬를 짜맞춘 뒤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 굴뚝은 담장보다 한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 위에 벽돌로 쌓았는데 벽면 크기가 너비 381㎝, 높이 236㎝, 두께 65㎝이다. 제일 아랫부분에는 좌우에 각각 벽사상(벽邪像)을 전(塼)으로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중앙부) 가로 303㎝, 세로 88㎝의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였다. 불로 장생을 상징하는 해, 산, 구름, 바위, 소나무, 대나무, 거북, 사슴, 학, 연꽃, 불로초 등을 제각기 다른 조형전(造形塼)으로 만들어 회벽에 화면을 구성하였으며, 그 위로 중앙에 용문전(龍文塼)을, 좌우에는 학문전(鶴文塼)을 끼웠는데 이 학들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조선의 제3대 태종은 경회루를 창건하면서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쌓아 작은 산을 만들고 아미산(峨嵋山)이라 불렀다. 아미산은 본래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박산현(博山縣)에 있는 유명한 산인데, 이를 상징적으로 붙인 것으로 교태전의 후원(後苑)이 된다. 아미산 동쪽위로는 큰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고 아래쪽으로는 기화요초와 간간이 과석이나 연지석, 일영대, 월영대 등의 석조물을 늘어놓아 운치를 더 하였다. 그 사이에 네 틀의 굴뚝을 꾸며 단조로움을 덜고 있다. 이 굴뚝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색 벽돌을 30단 또는 31단으로 쌓고 6각의 각면에는 네 가지 종류씩의 무늬를 구성하였다. 제일 아래부분은 벽사상(벽邪像)을 부조한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를..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에 대한 명칭에 대해서는 역대 왕조실록에 후원(後苑), 북원(北苑), 금원(禁苑) 등의 기록이 보이는데 후원이라 부른 것이 가장 많다. 요즈음 흔히 불리는 비원(秘苑)이란 명칭은 1904년(고종실록 광무 8년 7월 15일)부터 나타난다. 이 후원은 북악산의 한 줄기인 매봉을 등지고 자연의 지세에 따라 누정(樓亭)과 연못이 배치되었으며 곳곳에 차고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 후원 서쪽 담 안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는 금천교(錦川橋) 밑을 지나 남으로 흐르고 후원 동북쪽 옥류천 물은 동쪽으로 흘러간다. 땅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애련지(愛蓮池), 부용지(芙溶池)를 채우고 다시 넘쳐흘러서 창경원 춘당지에 들어 있다가 창경원 원내를 흘러서 남으로 나간다. 현재 남아 있는 연못은 부용정..
서울 종로구 와룡동 대조전을 나와 희정당을 뒤로하고 후원(後苑)을 향해 가다보면 창경궁 쪽 낮은 언덕 아래에 낙선재가 보인다. 낙선재는 지금 창덕궁에 속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원래는 창경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素服)으로 은거하던 곳이므로 상중에 근신하는 황후가 소박한 건물에서 예를 갖추는 법도를 지키도록 하여 단청도 하지 않았다. 후원은 절제되면서도 조화 있는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 1847년(헌종 13년)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 1926년 순종이 돌아가신 뒤 윤비(尹妃)가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으며, 일인들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일본여인 방자여사와 정략 결혼한 비운의 영친왕 이은(李垠)이 1963년 병든 몸으로 환국하여 살다가 간 곳이기..
서울 종로구 훈정동 정전에서 조금 떨어진 서편에 따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정전의 좌향보다 서편으로 약간 기울게 좌향을 잡았다. 그 지세에 맞도록 좌향 앉힌 것이다. 중앙 4칸을 크게 하여 지붕을 높이고 좌우 협칸을 그 보다 낮게 구조한 차이를 보인다. 중앙 4칸에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모시고 양옆 협실에 후대의 신위를 모셨다. 모든 부분은 정권과 엇비슷하다.
서울 종로구 훈정동 반듯한 터전에 담장을 쌓고 남쪽 중앙에 신문(神門) 3칸, 동편에 평삼문을, 서편에 편문을 내고 배산한 뒷편은 화계로 정리하였다. 정전은 단층이며 19실을 지어서 낮고 길게 구조되어 있다. 앞문 쪽으로는 아주 넓은 월대가 상하에 설치되었는데 하월대는 상월대보다 훨씬 넓게 구조 되어있다. 정전은 상월대 위에 다시 외벌대의 받침석을 설치하고 자리잡고 있어서 이들이 서로 조화하면서 한껏 장중함을 북돋웠다. 정전은 앞퇴가 넓게 열려 있어 갓기둥의 열주가 매우 엄중해 보인다. 이는 제례하는 공간의 소용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만일 정전에서 퇴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장중한 맛은 훨씬 덜하였을 것이다. 보통 퇴에 마루를 깔기도 하나 정전에서는 제상 놓고 바닥에 지의(地衣, 돗자리유형)깔고 집..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민간에서는 가묘(家廟) 또는 사당(祠堂)이라 하여 조상의 신위를 모시며, 왕가(王家)에서는 선대 임금의 신위를 모셔 종묘(宗廟)라 한다. 종묘의 제사가 그처럼 최고의 격식을 갖는 것이었던 만큼 종묘 자체도 나라안에서 으뜸가는 중요한 시설로 꼽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경복궁이 직접적인 왕권의 통치수단이라면 종묘는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온유적인 상징이었다. 종묘는 착수한 지 일년이 채 못된 1395년(태조4년) 9월, 경복궁 보다 먼저 완공된다. 도성 서편에 사직을, 동쪽에 종묘를 짓는 제도에 따른 것이다. 종묘가 완성된 해에 「태조실록」에 기록된 종묘의 규모는, '태조의 대실은 7칸이며 동당이실(同堂異室)로 하였다. 안에 석실 5칸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은 각각 2칸씩이며 ..
경남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 마암면 석마리 마을 입구 당산나무 곁에 있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신앙되는 말 형상의 석물 2구. 제작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화강석을 거칠게 다듬질하여 머리와 목 등이 거의 일직선이 되게 몸체를 만들고 귀, 눈, 코, 입, 꼬리를 선각한 토속적인 작품이다. 현재 3구가 있는 것은 일제시대 1구가 망가져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머리를 시멘트로 붙여서 본래 자리에 두고 대용으로 만들었다. 작은 석마를 새끼석마인 양 가운데 배치하여 두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피해를 입히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석마를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마을의 안과태평(安過泰平)을 위하여 헌관을 뽑아 정월 대보름에 마장군제(馬將軍祭)를 지내고 제사를 지낸 다음날 지신밟..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38 조선 인조 6년(1628)에 건립한 임경업 군수 선정비는 인조 4년 임장군이 1626년 5월에서 1628년 3월까지 낙안군수로 봉직하면서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하고 선정을 베푼 은덕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으로 임군수 임직후 군민이 세운것이다. 비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비신중앙에 해서체의 종서로 군수 임공경업 선정비라 쓰여져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비각 내의 편액과 표적비에 1748년 (영조 24년)과 1893년, 1952년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경업 조선 중기의 명장(名將).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은 평택. 충주 출신으로 1618년 무과에 급제한 뒤 22년 ..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번지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하나 병화 실화로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의 모양은 단층팔작(單層八作) 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3출목다포(三出目多包) 집이다. 전면 돌계단 소맷돌의 조각, 다듬은 돌초석, 용마루 중앙과 추녀마루의 장식들이 아름다운 건물이다. [대중교통]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표충사행버스를 이용하여 그 버스의 종점인 표충사 입구에서 하차한다. 버스로 약 40분가량 소요된다 .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무실종택의 입향시조는 전주 류씨 시조 완산백 류습공의 6대손 류성공이며, 무실문중은 퇴계학통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7대손 기봉 류복기선생과 문규를 제정한 8대손 도헌 류우잠공이 그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후 월회당 류원현공이 문중의 화목과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종택의 기도 유업과 월회당 현판은 예학의 산실임과 충효 숭조 애족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민도리홑처마팔작지붕 형태이다. 부속건물로는 솟을 대문 행랑채와 사당이 있다. 임하댐의 건설로 인하여 임동면 수곡동 691-1에서 1988년 현위치로 이건했다. 이곳에는 전주류씨의 종손이 현재도 거주하고 있으며 마을에 집이 몇 채 되지않아 시골 그대로의 여..
강원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1097외 6필지 화음동정사지는 고려 현종때 평강현감 김수증이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수항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 화음동에 정사를 짓고 은둔하던 곳이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으며, 음양소식관을 정사의 조경에 응용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도상화하여 "태극도", "하도락서", "선후천입괘도" 등을 정사의 경내 바위에 새겨 '인문석'이라 하고, 계곡에 있는 바위에 천근석·월굴암 등의 이름을 붙여 조경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송풍정·삼일정·부지암·유지당 등 몇채의 건물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산재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 인문석 북쪽으로 "삼일정", 서쪽으로 "월굴암", 남쪽으로 "천근석"의 각자와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다.
강원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 산76-1 숙암리 고분군은 삼척시 하장면 광동댐 북쪽 야산 구릉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능선의 완만한 평탄부에 5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고분의 분구는 원형으로 직경이 800-900㎝ 정도이며, 오랜 기간의 경과로 봉토의 대부분이 원상태로 잃고 있다. 많은 유구가 도굴된 것으로 보이며, 20여기는 상부가 노출되어 있다. 유구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해 묘광을 판 뒤 할석으로 4벽을 쌓아 길이 250㎝, 너비 70㎝ 내외의 석곽을 만든 뒤 5∼6매의 판석을 덮은 구조로 대부분의 장축 방향이 동-서로 등고선과 일치하고 있다. 주변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조각이 출토되고, 유구의 평면 상태가 세장방형을 띠고 있는 점, 상부에 판석을 덮은 점 등을 고려하면 삼국시대나 통일..